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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Dec 19. 2023

나의 새벽

현경이랑 세상 읽기

     2023년 11월 6일 월요일 오늘의 새벽 작업. 4시 50분부터. ‘네가 보고 싶어서 54’의 밑그림 작업. 일단 왼손으로 연필 스케치를 한다. 투박한 선은 투박한 대로 비뚤어진 선은 비뚤어진 대로 둔다. 예쁘고 세련되게 그으려 하지 않는다. 연필 스케치 위에 오른손으로 색연필 선을 긋는다. 왼손이 그어 놓은 서툰 연필 선을 오른손이 교정하지 않는다. 오른손은 왼손을 따라 긋는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 속 선 긋는 새벽.


     2023년 11월 7일 화요일 새벽 작업 기록. 5시 정각부터. 머리 부분을 채색했다. 무엇이 될지 나도 모르지만 일단 가 보기로 한다. 오늘 하루도 마찬가지. 두려워하지 말고 가 보자. 쭉 가 보자.


     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새벽 작업 기록. 4시 40분부터. 줄무늬가 얼기설기 난 괴물 친구의 몸통 부분을 채색했다. 오늘은 직장에서 부담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는 날이다. 어떤 순간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나의 새벽을 즐겼다. 나의 새벽은 세상의 그 어떤 풍파에도 끄떡없는 난공불락의 성채.


     2023년 11월 9일 목요일 새벽 작업 기록. 4시 30분부터. 부담스럽고 걱정됐던 일은 모두 가볍게 지나갔다. 역시,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인생은 늘, 걱정했던 것보다는 낫고 기대했던 것보다는 못하다.’ 오늘은 내 사랑스러운 괴물의 다리이자 팔, 발이자 손 부분을 채색했다. 이번 주말 완성을 예상해 본다.


     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새벽 작업 기록. 5시 30분부터. 어젯밤 늦게 잔 탓에 자꾸 졸음이 쏟아져 작업은 아주 조금밖에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요 속에서 선 긋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아쉬움은 없다. 주말 동안 큰 결심 한 가지를 해야 한다. 지회장 출마에 도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답은 시간이 가르쳐 줄 거라 믿는다.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것을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3년 11월 11일 토요일 새벽, 아니 아침 작업 기록. 7시 50분부터 잠깐. 이따가 계속 작업할 예정. 오늘 아침엔 전에 완성해 놓은 작품에 바니시를 뿌리는 작업을 했다. 바니시를 뿌리면서 생각했다. 이번 주말은 ‘동굴의 시간’이다. 마음만 먹었으면 참석했을 행사들이 있지만 일부러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다. 조용히 동굴 속에서 그림 그리고 책 읽으면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지회장 출마에 도전하면 나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도전하지 않았을 경우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진 않을 것인가. 십 년쯤 후에 되돌아봤을 때 이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일요일 밤에는 결정이 나 있어야 할 것이다.


     2023년 11월 12일 일요일 새벽 작업 기록. 6시 50분부터. 어젯밤 위스키를 마시며 완성한 ‘네가 보고 싶어서 54’의 사진 촬영을 했다. 지회장 출마 도전에 대한 고민은 90% 정도 끝난 것 같다. 도전을 하는 쪽으로. 어쩌면 나도 지금 이 그림 속 생명체처럼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성큼 한 발을 내딛고 있는지도.


     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새벽 작업 기록. 4시 50분부터. 오늘은 어제 물들여 놓은 종이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이디어가 무르익기 전에 조급하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충분히 바라보는 시간도 작업의 소중한 일부라고 생각하여 기록해 둔다. 지난주부터 고민했던 지회장 출마는 도전하는 것으로 확실히 결심했다. 오늘은 또 새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


     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새벽 작업 기록. 5시 30분부터. 채색된 종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왼손으로 연필 스케치를 했다. 오늘은 특히 바쁜 날이 될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선포해 놓았기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진심을 쏟을 것이다. 중꺾마 중꺾마.

     (중략)


     2023년 11월 24일 금요일 새벽 작업 기록. 5시 30분부터. 아주 조금밖에 진행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지회장 출마를 결심한 이후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활동가’로서의 삶을 잘 조화시켜 살아가고 싶다.


     전교조 충북지부 음성지회장 및 전국대의원 선거에 출마해 2주 정도의 선거운동을 거쳐 당선되기까지,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순간들을 보냈다. 그 기간 나를 떠받쳐 준 건 나의 조용한 새벽. 앞으로 내게 더 큰 역할이 주어질 것이고, 더 바쁜 날들이 오겠지. 그때도 나의 새벽은 나를 떠받쳐 줄 것이다. 오늘도 4시 30분에 눈을 떠 새벽 작업을 한다. 슥슥삭삭 선 긋는 고요 속 내 안에 차분히 솟는 용기, 용기, 용기.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56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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