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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번여사 May 19. 2023

스마트한 세상에 안 스마트했던 나의 버스 탑승기

오늘은 고치시로 이동하는 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자동차 타고...

이렇게 무언가 탈것을 타고 공간이동을 한다는 것은 삶의 커다란 활력소이고, 즐겁게 살게 해주는 나의 동력이다. 무언가를 타고 가 특히 즐거운 건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줄 때다. 기본적으로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력이 떨어진다면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나처럼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사람에겐 이 탈것의 존재는 시간이동이나 공간이동의 타임머신 같은 고마운 존재다.


마쓰야마시에서 고치현의 고치시로 이동하는 것도 고속버스를 타기로 했다. 고속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러 터미널에 들렀을 때 마쓰야마에서 고치시로 가는 고속버스는 하루에 단 5대가 운영 중이었다. 첫차가 8시 5분 , 그다음이 11시 58분. 그래서 나는 처음엔 10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마쓰야마시내를 슬렁슬렁 한 바퀴 산책한 뒤 11시 58분 차를 타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떠나기 전날 밤 생각이 바뀌었다. 아예 아침 일찍 서둘러 7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서 8시 5분 걸 타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마쓰야마시에서 열흘이라는 제법 오랜 시간 있었기 때문에 볼만큼 많이 보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고치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으니 몇 시간이라도 더 빨리 가서 여행을 채우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또 점심을 고치에서 먹고 싶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좀 느긋이 자고 일어났을 텐데 6시쯤은 일어나야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수 있을 듯해서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다 새벽 일찍 일어났다.


더 자고 싶은 사람들의 잠을 쫓기라도 하듯 덜덜거리는 캐리어 바퀴소리가 요란하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이것도 신경 쓰인다. 남에게 불편이나 피해를 주는,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라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나라, 어쩌면 나는 그 점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겉이든 뭐든 예의 바른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내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니까.


숙소에서 터미널까지는 제법 가까웠기 때문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지나있다. 그런데 도착해서 크게 당황했다. 매표소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이다. 예매를 해놓지도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순간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아뿔싸 내가 여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긴장감 없이 지내고 있었구나, 많이 느슨해졌구나를 깨달았다. 오전 7시 정도에 터미널 카운터의 직원이 왜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당연히 그들의 근무시간이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나 중심적인 사고를 봤나!


재빨리 다른 버스에 사람들이 어떻게 타는 지를 봤다. 그랬더니 이런 스마트한 도시 같으니라고! 한결같이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가만 생각하니 나도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며 살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시코쿠를 얼마나 낙후된 시골로 보고 있었길래 예매할 생각조차 안 해본 걸까 싶었다.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 중 혹시나 현금을 주고 타는 사람이 없나 봤더니 한 명도 없다. 휴대폰 아니면 인쇄해 온 듯한 종이 티켓이다. 멘붕까지는 아니지만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머릿속이 매우 빠른 속도로 속력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현금 주고 타야지 하고 생각했다. 현금을 그리 좋아하는 나라인데 뭘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신경이 조금은 곤두섰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하니 배짱 같은 게 올라온다. 그렇다고 버스 올 시간은 다가오는데 지금 와서 인터넷으로 예매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인상 찡그려가며 우리나라 고속버스 티머니 앱처럼 일본 전국 시외버스 승차권 통합 앱을 찾아 깔고 예매하고... 아! 머리가 벌써부터 아파와서 그냥 현금으로 버티기로 했다.


현금은 있나 머릿속에서 지갑 상태를 확인하니 만 엔짜리 지폐가 한 장 있다. 마쓰야마에서 고치까지 3900 앤 그러니 그거면 충분하니 돈도 있겠다 됐다. 그러다 만 엔짜리 지폐를 내미는 것보다 4000엔 주는 것이 그나마 나의 최선이고 친절 아니겠나 싶어서 만 엔짜리 지폐를 천 원짜리 지폐로 바꿔두기로 했다. 터미널 옆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갔다. 실은 살 것도 없다. 무얼 사지 한 바퀴 돌며 고민하다 마스크를 샀다.


아직까지도 여기는 마스크를 코로나 시절과 똑같이 전원, 아니 99점 98프로 정도의 사람들이 쓰고 다닌다. 도쿄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구먼. 이곳에서 나는 거의 쓰지 않지만 그래도 마스크가 예쁘게 생겨서 기념으로라도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 7장 들이 600엔가량 하는 마스크를 한 묶음 샀다. 자 나는 이제 잔돈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준비된 승객이다. 버스가 제시간에 오기만 하면 된다.


버스는 거의 제시간에 왔다. 간판에 쓰여 있던 안내 문구, 교통 상황에 따라 지연될 수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이제 나는 모험 같은 또 하나의 일을 치러야 한다. 남과는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은 늘 도전이고 모험 같다. 이 버스도 여지없이 모두들 휴대폰을 꺼내서 보여주며 버스에 오른다. 물론 나도 한국에선 그 누구보다 스마트한 삶으로 당당하게 나의 휴대폰을 무심한 척 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당당한 척하려 했으나 속으로 이내 나도 앱을 깔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랑 말랑 하다가 이제야 뭘 하며 기사에게 가서 당당히 현금을 내밀었다. 기사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나를 곧장 받아주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티켓을 보여주는 승객들 먼저 다 태운 뒤 마지막으로 나를 태우려는 심산인가 보다. 그러든지 말든지 태워만 주면 고맙겠다 정도로 나는 쪼그라들어 있다. 착실한 손님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기사가 나에게 오더니 돈을 받는다. 내가 내 돈을 주는데 이렇게 기분 좋을 수도 있군.


그런데 일처리 하는 속도가 내 기준치에 미달이다. 답답하게 느껴진다. 상당히 느리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왜 그리 도장들은 좋아하는 것인가? 무슨 종이에 도장을 찍고 버스 한번 타는 데 절차가 복잡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서 두 세 단계는 족히 축소해도 되겠다. 빨리 그리되어 살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지만 자기들만의 룰대로 잘 살아가고 있으니 그러던지 말 던지다. 버스에 무사히 탄 건 만으로도, 내 옆자리에 승객이 없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기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이 버스 타고 세 시간쯤 지나면 나는 강렬한 태양이 넘실거리는 이국적인 도시, 고치시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아! 설렌다. 고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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