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가모모씨 Jun 04. 2022

지쳤다는 건 집이 말해준다 | 겪은 글

某某씨 씀

노트북만 바라보면서 열심히 타자를 치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회사에서 과제가 주어진 주말이었다. 집은 이미 집의 형태를 버린지 오래다. 여기저기 널부러진 옷가지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탁자와 식탁, 언제 닦은지 알 수 없는 바닥, 쌓인 설거지, 온몸으로 그만 씻겨달라 얘기하는 화장실까지.

처음 독립할 때에는 꿈을 가득 안고 나만의 공간을 가졌었다. 겨우 5평 남짓한 집에 쓸데없이 베란다도 딸려있어서 내 한 몸 뉘이면 꽉 차는 방이었지만, 그 방도 쓸고 닦는다고 열심히였고 베란다까지 이리저리 꾸미면서 지냈다. 청소는 물론이며 요리까지 완벽히 부지런하고 이상적인 자취생이었다.

자취기간이 길어지고 집이 넓어지면서 그런 부지런함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하고 살아왔다. 정기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집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물건은 제때제때 치우고, 화장실과 베란다는 정기적으로 닦아준다. 적당히 세탁물이 쌓이면 세탁기를 돌리고, 속옷은 더운 물에 과탄산소다를 풀어 애벌빨래를 해준다. 수건은 매번 말려서 세탁바구니에 넣지만, 그래도 냄새가 날 즈음이면 한번씩 삶아준다.

독립하고 나서 배운 건 집의 상태는 곧 나의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여러 일을 못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몸담고 있는 업계가 워낙 바쁘기로 소문난 업계이다. 바쁠 때는 그저 사무실-집-사무실-집의 연속이고 일과 잠 외의 삶이란 없는 삶이다. 그렇지만 그런 때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싶게 여유가 넘치는 때가 오기도 한다.  

일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정신차리고 집을 둘러보면 딱 내 상태와 같다. 공간이 생기는 족족 물건을 늘여놓고 그저 벌레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쌓인 그릇들에 치이며 치우고 의자에도 옷가지가 걸려있고, 케이블과 전선이 여기저기 흩뜨려져 있고 화장실과 베란다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런 때에 집 모습은 딱 내 꼴과 같다. 언제 정리했는지 모르겠는 머리와 눈썹, 화장기는 커녕 화장품의 흔적도 찾기 힘든 피부, 패션은 없이 몸가리기에 급급한 옷가지.

그래서 "이게 집이야, 돼지우리야"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당장 쉬어야 해"라는 강력한 신호라고 생각한다. 집이 어지러울 때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더러워서의 이유보다도 컨디션의 빨간 불에도 어쩌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크다. 마음이 어지럽다면 집이 어지럽고, 집이 어지러운 걸 깨닫는 순간 우울함은 성큼 곁으로 다가와 있다.

처음 얘기로 돌아와 현재 내 집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변명해보자면, 12시 전후로 집에 들어오는 삶이 몇 개월 간 지속되고 있었다. 음식은 배달 음식으로 때우고, 설거지와 세탁물에 끌려 다니고, 청소보다는 잠을 선택하는 삶. 치워야 되는데라는 마음을 한켠에 치워두고 우선은 가만히 누워 쉬는 쪽을 택하게 되는 삶. 보통은 두어달 바쁘고, 한 달은 새벽퇴근을 하면, 한 주 정도는 여유가 생기고, 일 년에 한두번은 1-2주씩 풀로 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직 후에는 쉬는 텀 없이 12시 전후 퇴근이 계속되는 삶이 1년째였다. 주말에는 젊은 날 내 시절의 아빠마냥 집에서 잠만 자거나 근근이 약속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되어버린 것도 일 년째였다.

그러다 코로나로 강제 칩거에 들어가게 됐다. 확진은 아니었지만 조심해야 하는 상황. 회사 전체 휴무일까지 합쳐서 3일을 내리 집에서만 있게 되었다. 옷장을 차근히 정리하고, 정갈히 세탁을 한다. 깨끗해진 바닥에 청소기를 돌리고 쌓였던 재활용품을 내놓는다. 케이블과 전선은 보이지 않도록 정리한다. 식사 전에는 씻어 놓았던 그릇을 치우고, 식사는 직접 만들고, 야식은 먹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설거지는 먹은 직후에 하게 된다. 화장실도 말끔히 청소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집을 둘러본다. 마무리는 제철 재료를 포함한 장보기.

그러면 다음날에는 자연스럽게 머리도 말끔히 정리하고 푸석해진 피부를 돌려보려 화장품에 손을 뻗는다. 강제 칩거 상태는 여전한데도 스스로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건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옷을 입어 본다.그렇게 깨끗해진 집에서 2-3일 지내는 것만으로 '아, 잘 쉬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집의 모양새는 결국 나 자신의 모양새다. 집이 어지럽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만큼 어지럽혀져 있다는 것. 지쳤다는 것. 자취가 나에게 알려준 가장 정확한 자가진단법은 바로 집의 모양새를 살펴보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4D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허리를 사수할 것 | 겪은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