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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seok Min Jun 20. 2016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되어보니 알게된 아버지의 미안함

그 말이 정말 싫었다.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미안하다는 말들... 물려준거 없어 미안하다... 남들처럼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다른 아버지처럼 배운게 많지 못해 미안하다... 대학교에 다녀 본적 없어 뭘 알려주지 못 해 미안하다... 그 미안하다는 말은 사라지지도 않고 너무도 다양했다.


2012년 상견례를 며칠 앞둔 날이였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상견례를 미루자고... 왜냐는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담담하게 일하시던 중 사고가 있었고 손가락 일부가 잘리셨고 강원도에서는 그걸 붙이기가 어려워 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막내 아들 공부 방해될까 연락도 안 하시고 친구분들에게 연락해서 아픈 손 부여잡고 서울와서 수술 다 하시고야 연락을 주셨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은 미안하다였다. 떨어져나간 손가락은 내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인데 그냥 미안해하셨다.


시간이 지나 원인도 모르지만 아버지 온 몸에 백반증 증세가 심해져 흉하게 되어서도 미안해라고만 하셨다. 그런 모습이 부끄러우셔서 서울에 있는 아들 보러 오는게 싫다고 미안해라고만 하셨다. 그렇게 눈에 아른거리는 손녀 한번 보러 아들네에 못 오시면서 미안해만 하셨다. 늘 그런 식이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미안해 하실 필요가 없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고 가난한 집의 가장이였고 10년간 암투병을 하신 아내의 남편이였고 그 후 남겨진 두 아들의 아버지였다. 여유롭게 모시지는 못 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몇달씩이나 곁을 지킨건 아버지였고, 10년 암투병 어머니의 병수발을 남의 손 빌리지 않고 혼자 오롯이 해 내신 것도 아버지였고, 또한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잃은 나를 이만큼 키워내신건 아버지다. 단 하나 확실한건 지금 날 보고 아버지 덕에 잘 컸다는 사람은 있어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나 가난했기 때문에 잘 못 컸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뵈러 갈 때마다 늘 하시는 말씀은 미안하다였다. 그게 싫어서 화도 내 봤고, 나 잘 컸다고 시덥잖게 거들먹거려도 봤다.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알았다. 진짜 모든 감정 앞에 미안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뉴스를 보고 나오는 사건 사고에, 이렇게 험한 세상에 나오게 해서 미안했다.

날 닮아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를 달고 살아 밤에 기침을 할 때마다 미안했다.

어깨가 축쳐져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모습에 한번 더 안아주지 못 하고 뒤돌아 출근 버스 시간에 맞추어 달려야 할때도 미안했다.

야근하라는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 뒤로 하고 달려가 어린이집에 달려갔을 때 혼자 선생님과 있는 딸아이를 볼 때면 정말 미치도록 미안했다.

그냥 친구의 넓은 집이 부러운 적은 없었는데 그 집에 노는 친구 아이를 볼 때면 미안했다.

잘나지는 못 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 아버지에게 잘난 아들이라고 소리칠 수는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아이 앞에 서면 미안했다.

난 내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들을 남들 불편한 시선 감내하면서 하고 있는대도... 그 최선의 양이나 질과는 상관없이 정말 미안했다. 이런 세상에 하필 내 자식으로 나오게 해서 항상 미안했다.


이 감정은 아마 내 딸아이의 의사와 관계가 없는 것일 것이다. 말도 못 하는 딸이 커서 날 이해하는 나이가 된다 하더라도 난 미안할거 같다. 아마 내 딸도 나와 같이 이 미안함조차 짜증이 날 것이다. 그 짜증에도 미안할거 같다.


아빠는 그런 존재인거 같다. 그러면서도 그 표현이 서툴고 둔탁해 다른 감정으로 그 미안함을 풀지 못해 못나게 미안함에 익숙해져버리는 그런..


오늘 같이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던져 놓고 와 잡히지도 않는 일을 부여잡고 있는 날이면 아버지 생각이 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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