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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Apr 30. 2019

봄날의 달리기

지난 주말에는 남편과 달리기를 했다. 미국 동부의 긴 겨울동안 잔뜩 움츠렸던 어깨와 다리를 펴고 한 시간 정도 신나게 달렸다. 사실 날씨 때문이라기보다는, 몇 주 전에 프랑스 파리의 마라톤에 참가해서 완주를 하고 왔다는 남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남편도 조금씩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마지막으로 같이 달리기를 한게 언제였더라. 애틀란타에서의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2017년 가을부터 2018년 봄까지 남편이 계속 한국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2017년 봄/여름 즈음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대충 계산해보니 족히 2년은 되었다. 그 때 나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요가 쫄바지에, 빨간색 아디다스 쫄나시를 입고 뛰었고, 남편은 미국 성조기 모양의 별이 박힌 반바지를 입고 뛰었다. 우리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달렸고, 남편은 나를 "같이 뛰기 좋은 상대"라며 한껏 치켜올려 주었다. 같이 뛰기 좋은 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달렸다. 나는 그때랑 똑같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여전히 요가 바지와 요가 나시를 입었다. 남편은 며칠 전 새로 산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었다. 아울렛 몰에서 싸게 샀는데 남편은 엄청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우리는 휴대폰도 지갑도 없이 나와서 잘 모르는 길로 곧장 내달렸다. 동네의 작은 이차선 도로였지만 제법 경사가 있어 차들이 쌩쌩 달렸다. 찻길 옆 인도는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이름부터 오래되어 보이는 'Old Short Hills Road'를 따라서 양 옆에 키 크고 나이 많은 나무들이 드리웠다. 수천 개의 나무가지 끝에서 연두의 기운이 퍼졌다. 내가 자연에서 가장 사랑하는 색깔이다.


달리던 길 중간에는 숨이 끊긴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인도 쪽에 누워 있었는데, 아무래도 차에 치여서 죽은 것 같았다. 미국에서 운전하다보면 로드킬(road kill) 당한 동물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된다. 덩치 큰 사슴부터, 너구리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까지. 미국에 산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길에서 죽은 동물들을 보면 자동적으로 울상을 짓게 된다. 죽은 새 곁을 지나갈 때는 최대한 먼 앞쪽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고 뛰었다. 앞서가던 남편은 나를 잠시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직선으로 달리다가, 너무 멀리 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갔다. 차의 통행은 드물었고, 넓은 앞마당을 둔 큰 집들이 으리으리하게 늘어져 있었다. 나무들의 키는 아까보다 컸고, 새소리도 더 커졌다.

"우리도 저런 집 한 채 있었으면 좋겠다."

"저 집은 얼마쯤 하려나."

'돈 버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요즘 계속 마음 속으로 되뇌이는 말이다. 내리막의 경사가 심해져서 우리는 잠시 뛰기를 멈추고 걸었다. 몸이 가벼워지니 기분도 들떴다. 이토록 쉽게 육체의 상태에 반응하는 나의 감정이여. 한 번도 제대로 뛴 적 없는 지난 2년 동안의 정신과 감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길을 따라 쭉 걷고 달리기를 반복하다보니, 드디어 우리가 아는 길이 나왔다. 길은 저수지와 몇 개의 등산 트레일이 있는 동네 뒷산으로 이어졌다. 산 제일 위쪽에 'South Mountain Reservation'이라는 엄청 큰 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로 계곡과 조금 작은 저수지와 하천이 흘러 우리 집 앞 공원에 있는 호수까지 물길이 닿는다. 계곡 옆에는 크고 작은 꽃나무와 토끼풀꽃과 민들레가 만발해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이미 보송보송한 씨앗이 되어 바람에 날리기 직전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닥 가까이에는 거짓말처럼 쑥이 무성했다. 한 쪽에는 두릅나무랑 정말 비슷하게 생긴 가시 돋힌 나무들이 두릅이랑 정말 비슷하게 생긴 잎을 매달고 있었다. 예전에 몇 번 간 적 있는 한인 교회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뒷산에 쑥과 산나물이 많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두릅나물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나무가 너무 높고 가시도 꽤 억세보여서 한 번의 시도만에 포기했다. 대신 쑥 한 줌을 캐와서 저녁에 만든 생선요리에 써먹었다.


땅과 나무에서 나는 새싹을 보니 나도 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습관, 새로운 결심, 새로운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뉴저지에 이사와서 산 파키라 화분은 한 달 전부터 폭풍성장을 하더니 지금은 처음의 네 배만 한 몸집이 되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무에 아무 변화가 없어서 시들어 죽어버리는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아침에 볼 때랑 저녁에 볼 때 모양이 다를 만큼 빠르게 자라고 있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다시 한 번 남편이랑 달리러 나가야지. 그 때는 그 나무가 두릅나무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 봐야겠다. 이번에는 두릅튀김을 먹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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