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의 글

한 달 용 렌즈, S 양, 흘레, 소심한 여자, 제주도 애월의 카…

by 안아




한 달 용 렌즈


한 순간에 다신 볼일 없는 낱장의 실리콘 조각으로 전락해 버리는 그 물성.


여태 내가 두려워한 것이 그런 일이었다. 당장 없다고 죽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참 불편하고, 매일 함께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그래서 익숙해져 버린 것. 그렇지만 의사들은 말리는 것. 자동 세척 렌즈통이니 습윤제니 일본제 인공눈물이니 돈 많이 쓰게 하는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 것. 그러다가 특정 기간이 지나면 변기 물에 굴러들어가는 것


내 눈알 두 구를 담당하던 것이

1.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것이 되었으며

2. 더 이상 보이지 않아 허탈함. 무지...





S 양


나에겐 무려 시온예능어린이집 6세 꽃잎반 동기, 친구보단 보물에 가까운 관계 S양이 있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이어져 매년 한 번 이상은 꼭 봐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로 매끄러운 우리 관계가 딱 한 번 어그러진 때가 있었다. 우리의 관계를 유난히 질투했던 5학년 2반 J양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순두부 두 덩이들.

“너 기억나? 걔가 은경쌤한테 내가 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부럽다고...(중략)“


전남자친구의 행패에 마음을 다쳤던 S양이 중앙대 앞으로 찾아와 준 날이었다. 나도 몰랐던 웃기고 소중한 기억을 꺼내준 친구에게 울지 말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 납작한 키작남이 일하는 합정의 카페에 가서 유리컵을 대략 500개 정도 깨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로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흘레


특별히 기억해 두는 순우리말 중에 ‘흘레’라는 사어가 있다.

인간은 번식행위를 동물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도화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님. 그럼에도 어떤 때에는 마치 삶의 목적이 번식뿐인 것처럼 내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무언가를 울컥! 흘려보내고 점잖은 인간으로 돌아오기.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존경하는 글을 읽고 있자면 지금 내 선택이 윤리의 틀 안에서 용서될 수 있을까 두렵다.

뇌가 말랑할 때 글을 읽어야 모조리 느낄 수

있단 말야...





소심한 여자


22학번 이현지가 2022년이 끝나고 본인의 1학년을 회고한 글을 발견했다. 15줄 정도 되는 글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새로운 시작보다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훨씬 가까웠다. 보통의 새내기들이 신입생이라는 안전모 아래에서 만끽하는 자유를 그대로 누리지 못했다. 어쩌면 고등학교 4학년에 더 가까웠을 성싶다”인데 미친 거 아냐. 너 그때 매 순간 과감했어 현지야...


- 그때 보다 아는 것이, 보이는 것이 늘어나 모든 결심 앞에서 소심해져 버린 4학년의 현지가





2024.07.12. 혼자 떠난 제주도 애월에서 쓰는 글


헤르만 헤세는 간혹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견딜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고 했다. 나는 나의 낙원을 잃어버렸다고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역시 세계적인 작가는 달라도 참 다르다고 생각하며 바다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어딜 가나 그곳에서 사는 사람인척 한다. 과하게 두리번거리는 것을 피하며, 유명한 식당보다 얇은 골목 속 허름한 간판을 찾아다닌다. 한 곳을 골라 거침없이 걸어 들어간 후엔, 이미 자리 잡은 사람들의 식탁 위에 어떤 것들이 올라 있는지 엿본다. 그리고 점원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하는 거다. “저분이랑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새로운 곳에서의 동화를 즐기는 나지만 낙원에서만큼은 탕아로 살고 싶다. 거리를 둠으로서 낙원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낙원에 적응하면 난 앞으로 또 어떤 새로움을 찾아 좇아야 할지, 찾는 과정에서 또다시 얼마나 많은 무너짐과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할지 고민할 여유가 없다. 자극기아 속에서도 그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성격은 나로 하여금 평생을 몰래 두리번거리는 l'étrangère로 살게 한다.


나는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닿아본 적 없는 공간을 동경할 수 있음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작은 경험의 조각들에 상상력이 엉겨 붙은 나른한 곳.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안정감과, 나 또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의 평화. 사납게 부서지는 파도는 잔잔한 마음가짐일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알코올의존증


어떤 책을 읽어도 술만 나오면 멈칫

본디 술에 대한 글을 꼭 써보리라 마음먹은 지는 꽤 되었지만 쉽사리 시작할 수 없었다. 그땐 바보처럼 글 써놓고 스스로 만족했던 터라, 사랑하는 것은 낯부끄러울 정도로 찬미할 수 있었던 나였다.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비운 술병만 족히 1000병은 넘을 텐데 당최 내가 이걸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랑이라기엔 제발 이걸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미워한다기엔 이거 없인 컴컴한 그 며칠을 견딜 수가 없다.


담을 것은 많은데 면적은 좁아 압축하고 압축하다

펑- 터져버리기 일쑤였던 내 마음. 구멍이 뚫려 액체의 내용물이 줄줄 새어 나오다가 시간이라는 약을 만나 굳어지고, 그렇게 터지고 굳길 반복하는데도 절대 넓어지진 않는 울퉁불퉁 좁은 내 마음. 시간이 지나 미간 주름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그땐 넓어지겠지 하며 은밀히 꿈꾸는 내 마음.

그리고 그 꿈은 3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그 남자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은 털북숭이 꼬미나, 법치국가에서 가장 무거운 죄를 지어도 그들의 편에 서겠다 다짐케 하는 엄마나 아빠조차도 이뤄줄 수 없다.

오직 술만이 내 마음을 넓고 평평하게 만들어 준다. 작은 튿어짐 하나 없는 실크처럼 부드럽고 넓적하게.





오일파스텔로 끼적인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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