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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Nov 25. 2022

잘 죽는 법을 권한 모진 년

"호스피스는 죽을 사람이나 가는 곳이지!"

 “미영아, 그 얘기는 왜 꺼냈냐? 이제 너 안 본단다.”

 아빠는 그러셨지만, 나는 새엄마에게 마지막 정으로 충언을 한 거다. 엄마가 얼마나 나와 친자식들을 편 가르고, 나만 잘못되라고 고사를 지내왔던가. 그 모짊에 비하면 나의 진심 어린 권유는 얼마나 인간적인지. 영화 ‘안녕하세요’에서 이순재 할아버지가 그랬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이 내 말을 곧이들을 리가 없지, 잘 살지 못한 사람에게 잘 죽을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거다.


 아빠는 지난 10개월간 새엄마의 병간호를 도맡아 왔다. 평생 쉬는 날도 없이 돈 벌고, 이제 은퇴하고 좀 편하려나 싶었다. 아무튼 저 인간은 아빠가 편한 꼴을 못 본다. 삼시세끼 보양식으로 해 먹이고, 항암 효과 있다는 옻도 고아 먹이고, 혹시 잘못될까 싶어 밤새 곁을 지켜줘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장 보러 외출하면 나 혼자 두고 어디 다녀왔냐, 왜 먹을 반찬이 없냐, 불평 일색이었다.


 “저 사람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갈지도 몰라.”

 아버지 평생에 배우자 병 수발만 두 번째다. 이제는 나이도 많으니 그 피로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겠지. 어린아이 둘을 키우며 병원 교대 근무를 하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용돈 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죽음 가까이에 있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근무한 곳은 만성환자들이 입원하는 병동이었는데, 몇몇 환자들은 상태가 나빠져 돌아가시기도 했다. 밤 근무를 마치고 기숙사 방에 돌아와 이유 없이 엉엉 운 적이 있었다. 누가 돌아가신 날도 아니었고 인계인수하면서 혼나지도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운 이유를 알았다.


 '환자가 밝게 웃으며 퇴원하는 모습을 언제 봤었지? 나는 그동안 뭘 한 거지?'

 나는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그건 언제나 지는 싸움이었다.


 대학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견학을 갔었다. 소독액과 밥 냄새가 뒤섞인 6인실 복도를 지나, 파란 하늘과 꽃이 만개한 정원 그림으로 장식이 된 공간을 마주했다. 병실은 딱 2개. 널찍한 1인실에 환자용 침대, 제대로 된 보호자용 침대, 휴게용 탁자와 의자 몇 개가 갖춰져 있었다. 가족이 24시간 환자 곁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병원에 돈이 되는 적극적인 생명 연장 치료를 하지 않고 수액이나 진통제만 투여받는 환자를 입원시킨다니 놀라웠다. 의료인뿐만 아니라 종교인, 영양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임종을 앞둔 이가 평온하게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는 그 정신에 감동했었다.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의료인이 환자와 가족이 편안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건, 이런 치료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문하지 않아도 되고, 고통만 유발하는 치료를 하면서 정작 도움을 주지 못하는 모순을 피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나는,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호스피스의 문을 연 갈바리 의원에서 제작한 영상을 모조리 찾아봤다. 아픈 이는 각자의 보폭대로 죽음에 다가갔다. 그들은 이따금 가쁜 숨을 내쉬기도,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생일파티, 윷놀이, 음식 만들기 등의 일상을 이어갔다. 가족들은 먼저 가려는 그 소중한 사람과 같이 힘들어하고 같이 웃었다.


 그분의 사후에도 호스피스 공동체 안에서 사별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애도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나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영상 속 사람들과 함께 울었다. 오래 정들었던 환자들의 임종 앞에서도 이성의 힘을 빌어 애써 침착해야 했던 나였다. 엄마가 떠났을 때는 죽는 게 무엇인지 몰라 울지 못했던 나였다.


 새엄마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호스피스 몇 군데를 알아봤다. 병원에서 받을만한 치료가 없다고 하는 때가 되면 호스피스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갈바리 의원은 대기자가 많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모현 호스피스를 알아봤지만, 몇 해 전 폐원하고 노인요양원이 되어 있었다.


 충격으로 잠시 멍하게 안내문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인터넷에서 호스피스 정보를 다시 검색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적당한 곳이 있었다. 가정에 찾아와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곳이었다. 새엄마가 여기에 등록하면 진통제도 충분히 맞으면서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다. 자기를 빼닮은 막내도 매일 볼 수 있고, 보고 싶은 사람들 불러놓고 작별도 고할 수 있을 거다. 엄마도 좀 편해질 것이고.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직접 가 볼 수는 없었지만, 운영한 이력도 10년 이상 되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괜찮겠다 싶었다.


 새엄마는 6인실 철제 침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 방역지침 때문에 환자 침상 옆에는 보호자든, 면회객이든 단 한 명만 머무를 수 있었다. 커튼을 쳤지만 우리의 대화는 실시간 공유되고 있어서 나는 속삭여야 했다.


 "좀 추운 것 같은데 이불 좀 덮어 드릴까요?"

 "아니, 난방 잘 나와서, 하나도 안 추워."

 "뭐 좀 드셨어요?"

 "그래. 네 아빠가 이렇게 오렌지도 다 까서 챙겨 주잖니? 점심밥도 골고루 다 먹었고. 기운 차려서 다음 치료 받아야지, 얼른 나으려면."


 갑자기 계획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온 건 왜였을까.

 “엄마, 호스피스에 가면 여기보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요. 집에 계시면서 호스피스 불러도 되고요.”

 "싫다. 거긴 죽을 사람이나 가는 곳이지."


 이겨내라는 응원의 말을 듣고 싶었을 거다. 뭐라도 먹고 열심히 찔리고 독한 약을 맞으면 다 나을 거라는, 그런 거짓 희망이라도 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아직 믿고 있는 거다. 항암치료가 잘 되면, 의사가 못 한다고 했던 수술까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하게도, 평소에 발길을 끊고 지내던 전처소생이 찾아온 건, 의사가 아버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염치로 나에게 그런 호의를 바랐을까.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죽음 앞에서도. 암세포만 골라서 공격하지 못하는 항암제 때문에 머리카락, 속눈썹, 음모마저 다 빠져서 발가벗겨져 죽음 앞에 서 있는 지금도, 절반은 고아였던 여섯 살 어린아이를 최소한으로 먹이고 입혔다는 이유로, 자신은 날개 없는 천사로 칭송받고 대접받아야 마땅하다고, 아직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걸까.


 새엄마라는 여자를 너무 사랑하고 믿었던 아빠 덕분에, 힘든 삶을 홀로 견뎌내야만 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환자복으로 앙상한 몸을 가리고 마지막을 향해 가는 초라한 인간을 내려보고 있다.


 네가 벌주지 않아도 신이 벌하시잖아. 네 손에 피를 묻힐 필요 없어. 네 삶에 훼방놓으려던 사람 앞에 이렇게 강건히 서 있으니 네가 이긴 거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깨닫지도, 용서받지도, 자신에게서조차 구원받지 못했어. 그러니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명정대하지.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누구나 평온하게 죽는 건 아니거든.


 미영이는 그 아이에게 속삭인다. 부탁이야, 제발, 그냥 내버려 둬.


* 사진 : Unsplash (Martha Dominguez de Gouv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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