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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May 07. 2022

나의 해방일기

드라마 리뷰 아닙니다

드디어 해방이다. 길고 길었던 시간이 이렇게 끝날 줄 몰랐는데, 타들어 갈 듯한 시간이 나를 통과했고 타다 남은 육신은 재로 변했으며 결국 모든 게 녹아내렸다. 십 년 전 즈음 오늘을 상상하며 천천히 써 내려갔던 글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동안 세상은 달라졌고 많은 게 바뀌었으며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변했다. 다시 되돌리거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그리던 어떤 날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졌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시원 해방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해, 세상을 배 울타리를 넘어 거친 들판으로 뛰어들었다. 누군가 꿈을 펼치는 장소이자 기회의 땅이었지만 나에게는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 는 야생이었다. 준비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과 공기의 흐름을 읽어가며 묵묵히 버텼다. 뚜렷한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향으로 걸었다. 지, 살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조차 힘들고 아파서 지친 동료들은 고개를 숙이며 뒤처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결국 혼자 살겠다며 앞만 보고 십 년을 걸었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까지 갈 수 있었던 해, 이역만리 타지에서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그때부터 거칠고 힘들었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변하며 생존보다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앞을 가리는 장벽은 높았다. 장애물 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계속 앞만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더 걸었다.



어떤 날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가끔은 비난의 체가 되기도 했다. 목적지 없는 걸음이었지만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다 보니 가족과 행복을 유지하고 싶은 작은 목표가 가슴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둘만의 행복으로부족했는지 하늘에서 새로운 보물을 우리에게 선물고, 두 개의 보물을 통해서 행복한 시간은 더욱 소중해졌다. 여유로움과 안정적인 생활이 유지되면서 언 찾아올지 모를 불행은 애써 외면했다. 어떤 날은 미래에 대한 계획 세우고 또 다른 어떤 날들은 삶을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이 계속 우리 곁에 머물렀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국민 절반이 감염된 뒤 역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던 해, 여유로운 삶 속에서 생각은 많아지고 깊어졌다. 말은 줄었으며, 순간을 놓치기 은 감정이 커지면서 삶을 글에 담기 시작했다. 담긴 이 가득 쌓일수록 더 큰 그릇으로 바꿀 수 있었고, 깊고 넓어진 그릇을 통해서 수용과 인정을 배울 수 있었다.



더 할 수 있는데, 그만하겠다며 큰소리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해, 그동안 스스로 위선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면서 뒤로 물러나는 척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욕심과 욕망은 꿈틀거렸다. 당당하지 못했고,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 돌아보며 굳은 다짐을 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결과만 중시하던 인간 아닌 과정도 옳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오늘 내 마지막 거수경례는 하강하는 태극기를 향한다. 그동안 국가관이나 사명감이 투철하지 않았지만, 하기식 때는 늘 경건했다. 평소 솔선수범하거나 희생정신이 남다른 것 아니었지하기식 예령에 단 한 번도 서둘러서 몸을 숨기거나 도망가지 않고 바른 자세로 경례했다. 그 순간 내가 해야 하는 일이 경례뿐이었고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충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고 집중했다.



거창하게 조국을 통일하거나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가족과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힘이 닿을지 모르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께하는 동안 찰나에도 진정성 있게 충성했다.



과거에 그렸던 어떤 날이 오늘이 되었다. 당시 어떤 날이 오면 스스로 당당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후회하거나 부끄럽지는 않다. 삼십 년 전 어떤 날 앞으로 삼십 년 동안 일 하자는 결심을 이뤘고, 이십 년 전 어떤 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자는 약속을 지켰으며, 십 년 전 어떤 날 십 년 동안 글을 쓰기로 한 목표달성했다.



다른 어떤 날 오늘을 해방일이라면서 그때까지 무사히 지내자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방일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과거 어떤 날로 돌아가고 싶거나 과거에 상상했던 어떤 날 후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살아낸 것 같다.  작은 소망이 이뤄진 오늘을 이제는 어떤 날이 아닌 해방일이라 부르고 싶다. 이상.



2032년 7월 31일 계룡대에서





보글보글 오월 첫째 주 "내가 00하는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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