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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Apr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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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채우는 법



가끔 환자들이 묻는다.

한의사 원장님들도 침 맞으세요?

그러면 나는 답한다.

그럼요. 쉬는 날 제일 빠른 시간에 봉침 맞으러 가는걸요.








요즘은 열심히 추나치료를 하고 있다.

얼마간 쉬다가 다시 시작한 일이라 첫 주는 정말 골골댔다.

침대에 눕고 일어날 때 빠짐없이 '아이고'소리가 났다. 입에서 그냥 터지더라.

손가락 온 마디가 빠짐없이 아프고, 힘을 많이 주는 검지손가락은 덜그럭거렸다.

저녁마다 남편 목을 꺾으며 쓰러스트 연습을 했다.

출근하면 침 치료를 하고, 휴무일에는 침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찾아온 변화에는 장점이 있다.

직접 침을 맞아 보니 효과가 좋다는 걸 더 확실히 느끼고,

그래서 환자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원장님의 침치료 방식, 상담 방식을 환자로서 배우고 나도 환자에게 써볼 수 있는 것.


일 자체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업으로서 나에게 오신 환자들을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것. 아픔을 덜어드리는 것.

베드에서 잠시나마 이완하며 안정하도록 돕는 것.


한편으로 슬픈 거라면, 침을 전에는 뜸하게 맞았는데

지금은 출석도장 찍듯 한의원에 다닌다는 것?



사실 장점은 그 외에도 많다.

쉴 때 수면패턴이 이리저리 밀려 엉망이었는데 습관이 바로잡혔다.

집에 누워있기 좋아하는 나를 정기적으로 집 밖에 꺼내 주는 루틴도 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를 알차고 쓸모 있게 보냈다는 감각.

오늘의 인생을 소중하게 썼음을 자각하면서 오는 편안함.

침대에 누웠을 때 찜찜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불안함이 사라졌다.



사실 쉴 때 수면패턴이 흐트러진 건 나 자신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에너지가 남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졸업 이후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

따끈따끈 갓 인쇄된 한의사 면허증을 받으면서부터 학교 병원 인턴에 합격하여 일을 시작했고, 다음 해는 또 레지던트라 끊김 없이 일이 이어졌다.

한 번 취직하면 오래 다녔고 퇴사 즈음에는 쉬어야지 항상 다짐했지만 오래간 적이 없었다.

일복이 많은 팔자라고 했던가.



그러다 몇 달 간이지만 이렇게 길게 쉰 건 처음이었다.

처음만 해도 다짐이 엄청났는데. 무위도식하며 신나게 놀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쉬니까 오히려 책도 일할 때처럼 잘 안 읽히고 세련된 카페를 가도 일할 때만큼 신나지가 않고.

오히려 옷도 더 안 사게 되는 느낌?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지내면서 하나둘 할 줄 아는 요리도 생기고 그것도 뿌듯함을 주었다.

일할 때는 힘들어서 못 듣던 다양한 강의도 들어 보았고.

하지만 새벽에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읽을거리,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는 했다.

잠드는 시간은 2시, 다시 3시로 밀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더 늦게 일어나면 되니까.


일어나는 시간이 정오에 점점 수렴하면서부터,

그리고 정오에 일어나는 게 이제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면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퇴근 즈음에는 사람이 거의 방전된다.

버석한 얼굴을 숨길 수가 없다. 눈도 뻑뻑하고.

침침하게 차에 타서 집으로 달려가지만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침대로 몸을 던질 때 터져 나오는 행복감이 있다.

지금 이렇게 까무룩 잠들면 아침에는 충전된 채로 일어나겠지. 100%는 아니겠지만?


그렇구나.

나는 충전되고 싶어서 방전을 선택한 것이었음을 느낀다.

다시 나를 채우고 싶어서,

생생하게 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 비워내기로 정한 것이었구나.



추나치료를 하면서부터 반드시 자기 전에 스트레칭을 한다.

허리가 너무 뻐근하고, 손가락도 다시 덜그럭거리니까.

이 정도는 심리적 충만함의 대가로 보아야겠지?

자주 가는 한의원을 검색한다. 내일 아침 제일 빠른 시간으로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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