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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Aug 20. 2020

#8 백이숙제를_한하노라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⓼

#8 백이숙제를_한하노라     


왕조시대 유학자들이 추구하는 제일의 가치 중 하나는 충(忠)이었다. 

또한 충은 ‘효(孝)’와 더불어 공자가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한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충은 의(義)로써 행할 수 있었다. 현대의 유전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의’가 ‘충’의 표현형인 셈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69개 「열전」 중에 ‘의’의 상징인 「백이 열전」을 맨 앞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이렇듯 ‘의’를 말할 때면 맨 먼저 거명되는 사람은 백이와 숙제였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였다. 

백이가 첫째아들이고 숙제는 셋째아들이었는데, 아버지는 가장 현명한 숙제에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이를 안 백이는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명령”이라며 홀로 나라를 떠나려 했다. 그러자 숙제도 형을 따라 나라를 떠났다. 결국 둘째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문왕에게 의탁하러 갔으나 그는 이미 죽은 뒤였다. 그때 주나라 무왕이 아버지인 문왕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으로 은나라(원래 국호는 ‘상(商)’인데 은허 유적이 발굴된 뒤로 사람들은 은나라라고도 불렀다) 주왕을 정벌하러 길을 나서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벌이는 것을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좌우의 신하들이 무기를 들고 형제를 죽이려고 했다. 그때 강태공(여상)이 나서서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므로 죽이지 못하게 했다. 


마침내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주나라 곡식을 먹는 걸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나 캐 먹고 연명하다 결국 굶어 죽었다. 이로써 백이숙제 형제와 수양산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충의의 상징이 되었다.


백이숙제 이야기와 사육신 이야기는 몇 개의 연결고리가 있다. 

우선 형제가 숨어들어간 수양산과 세조의 군호인 수양대군의 ‘수양’이라는 한자가 동일했다. 사실 세조가 왕자였던 시절 처음 받은 군호는 수양이 아니었다. 처음엔 진평이었다가 다시 함평과 진양을 거쳐 네 번째로 받은 게 수양이었다.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1445년에 바꾼 군호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충의의 상징인 백이숙제가 은거하던 산 이름과 같았다. 어쩌면 세종은 둘째아들의 성품을 알고 일종의 액막이 차원에서 군호를 수양산에서 따온 건 아닐까.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은거한 것처럼 둘째아들도 충의를 지켜주길 바란 건 아닐까. 첫째아들인 문종은 늘 병에 시달리고 심약한데다, 손자(단종)는 다섯 살밖에 안된 아기였다. 그러니 자신의 사후에 예상되는 권력 다툼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을 부탁한 것도 그 즈음일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 편찬을 지시한 것도 어쩌면 태자의 삶을 버리고 해탈을 이룬 석가모니의 일생을 배움으로써 권력욕 강한 아들이 마음을 다스리고 비워내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심증은 가지만 확증할 길은 없다.  


두 번째는 백이숙제와 성삼문의 인연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유가들에게 충의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백이숙제에게 충고하고 호통을 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성삼문이었다. 성삼문은 젊은 시절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난하사(灤河祠)에 들른 적이 있었다. ‘난하’는 북경 동북쪽에 있는 강 이름이고, 난하사는 백이숙제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그곳에서 성삼문은 <난하사>라는 시를 지었다.       


그때는 말고삐 잡고 감히 그르다 말했으니

대의는 해와 달처럼 당당하게 빛났었지만

초목 또한 주나라 비와 이슬을 맞은 것인데

수양산 고사리를 먹은 건 부끄러운 일이네     


남들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나 캐먹으며 연명하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데, 성삼문은 그 고사리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먹고 자란 것이니 진정한 충의를 지킨다면 그것을 먹는 것조차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나무랐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라면 고사리조차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이니 백이숙제의 충의보다 성삼문의 충의가 한 수 위인 셈이었다. 일설에는 성삼문이 이 시를 지어 그곳에 있는 이제비(夷齊碑)에 붙이니 비석에서 땀이 주르르 흘렀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백이숙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땀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최소한 부끄러움에 땀을 흘릴 줄 아는 이라면 그 진심을 믿어도 좋을 것 아닌가. 시대가 바뀌어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지금은 충이라는 개념은 그 유효기간이 끝났다. 문제는 부끄러움도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랏일 한다고 큰소리치는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럴듯한 말로 시시비비를 따지지만, 수오지심은 모른다. 아무리 부끄러운 짓을 해도 땀조차 흘릴 줄 모른다. 백이숙제처럼 물러날 줄도 모르고, 성삼문처럼 목숨을 던질 줄도 모른다. 


이 시는 시조로 변형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건 이 시조가 훨씬 강했다. 성삼문의 죽음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캐먹는단 말인가

비록 작은 것인들 그 또한 누구 땅에 난 것인가


엄찬 고택, 홍성군 노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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