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홀러의 WOAP 후 가진 데이오프
8월 10일부터 26일까지 뉴질랜드 웰링턴에서는 Wellington On A Plate 라는 페스티벌이 있었다. 웰링턴에 있는 레스토랑, 펍, 바에서 이 페스티벌을 위한 버거나 칵테일, 세트메뉴를 판매하는 것인데 8월 정도가 되면 하는 행사라고 한다.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는 버거와 칵테일, 그리고 칵테일을 시킬 때마다 안주처럼 같이 곁들여지는 타파스를 판매했는데, 정말 살다 살다 내가 이렇게 버거를 많이 만들 줄은 몰랐다. 레스토랑이 원래는 일요일, 월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았는데 페스티벌 기간 동안 월요일에도 장사를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런치부터 디너까지 booking은 항상 꽉 차있고 가게 안에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없으니 take away는 또 왜 그렇게도 많이들 하는지. 저번 주에는 60시간 정도, 그리고 이번 주에는 65시간 정도 일을 했다. 하루하루 디데이를 꼽으면서 언제 이 기간이 지나가나 싶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씻고 자고 눈 뜨면 세수하고 출근하고. 25일 토요일인 어제가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었다. 키친을 청소하고 같이 일한 스텝들끼리 앉아서 버거와 맥주를 마시고 그렇게 페스티벌을 마무리.
그렇게 일하느라 페스티벌 기간 동안 정작 나는 고작 한 군데의 버거밖에 맛보지 못했다. 페스티벌 시작 전에는 먹고 싶었던 곳을 몇 군데 찜해놓긴 했는데 너무 힘들기도 하고 하루 종일 버거를 만드는 내 입장에선 먹고 싶지 않아서 찾아다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사다 놓았던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침대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유튜브를 보면서 마시다가 약간 알딸딸해지고 누워서 음악을 듣다가 그렇게 잠이 든 것 같다. 퇴근을 하면서 생각했던 나의 데이오프.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 페스티벌 기간 동안 바쁘게 일도 했는데 중간 브레이크 타임 때는 플랫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에 살던 플랫 계약기간이 끝나가서 새로운 플랫을 알아본다고 한 달 전부터 알아봤는데, 이 곳은 내가 원한다고 그 플랫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집주인, 혹은 같이 살게 될 플랫 메이트들도 선택을 하는 거라 고생 좀 했다.
여하튼 새로 이사 온 플랫에서 누워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빨래는 쌓여 있고, 배는 고프고, 커피도 마시고 싶고. 일단은 세탁기부터 먼저 돌리자 싶어서 빨랫감을 들고 밖을 보니 날씨가 너무 좋더라. 바람의 도시인 웰링턴 답게 바람은 여전히 많이 불지만 그래도 맑은 날씨라서 외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오랜만에 메이크업도 하고 좋아하는 향수도 뿌리고 그렇게 밖을 나오니 눈이 부신 햇살과 파란 하늘 그리고 움직이는 구름. 행사 마지막 날이니까 일요일이라도 오픈한 다른 가게의 버거를 하나라도 더 먹어볼까 했는데 눈에 띈 일식 레스토랑이 있어서 생맥주랑 돈까스를 시켜서 점심으로 먹었다.
사다 놓았던 몽쉘이 다 떨어져서 당 충전해야 하니까 한인마트 가서 군것질 거리도 좀 사고, 한글로 된 책이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가서 서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참고로 웰링턴 시티 안에 있는 센트럴 도서관 2층에는 한국소설과 음반이 있는 코너가 따로 있다. 책이 엄청 많은 건 아니지만 종이로 된 책을 읽고 싶은 나의 경우, 아쉬울 때마다 가서 책을 빌려 읽는다.) 이번에는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서 어딜 갈까 하다가 시향 해보고 싶은 향수가 있어서 Lamton Quay에 있는 MECCA에 가서 향수도 시향 해보고, MOJO에 가서 라떼도 한 잔 take away 해서 마시다가 길거리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순간도 지나가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는 한국 노래인데 현재 내가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니란 사실에 이질감이 느껴져서.
워크 비자를 신청하면서도 많은 갈등이 있었다. 신청을 했지만 차라리 승인을 거절당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는 익숙해진 이 생활에서 느껴지는 지루함,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데 먹지 못하는 현실, 생존 영어를 구사하는 내가 상대방에게 감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 요리를 그만하고 싶은 생각.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맞물려서 그랬는데 또 바쁘게, 정신없이 일을 하고 난 후에 얻은 이틀의 데이오프를 생각하니 조금은 행복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평생을 살 것도 아니고 내게 주어진 비자기간 동안에만 지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욕심이 너무나도 많은 나라서, 작은 소소함에 만족하기보단 불평과 불만을 더 쏟아내지만 아주 작은 것에서라도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불평만 하기보단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하는 걸로 삶에서 행복을 더 느낄 수 있었으면. 항상 좋을 수만은 없고 항상 나쁠 수만도 없으니까.
몇 살이 되었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수 있었으면 한다. 노력이라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간단히 결론 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려는 대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볼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또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잃는 것이 반드시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랑이 있었으면 좋겠다. /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