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 시절의 첫 번째 끝내주는 괴물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들은 이야기 세상에 빠져든다. 이야기 자체가 무엇이든 그것은 강력한 모험과 마법의 세계이다. 활자는 먼 곳으로 떠나는 비밀 여행의 주문이고, 삽화는 뜨거운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며 놀랍도록 애잔하고 달콤한 치유의 부적이다. 이야기 세상에는 늘 우리의 숨결을 벅차게 만드는 인물, 경이로운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그저 단순히 그럴듯한 인물이 아니다. 생생하고 우수 어린 눈동자를 지닌 친구이며 맑고 청아한 음성을 지닌 연인이다. 아이들은 친구와 연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먼 훗날에 가서야 친구가 바로 연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비애의 숨결과 용기의 입김이 그윽한 친구의 목소리는 모험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귓가에 끊임없이 맴도는 따뜻한 격려이고 기운을 샘솟게 하는 응원의 노래였다.
이러한 이야기 세상은 처음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네모진 컷 속의 그림 세상, 즉 만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세계 명작이라는 문장 속의 세계로 젖어드는 천재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단계가 있기 마련이라서.
H중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치신 이상주 선생님은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재미라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요. 만화가 재미있는 아이는 만화책을 열심히 봐야 해. 그러고 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만화는 이제 지루해지고, 무협지가 재미있어질 거야. 그럼 무협지를 열심히 봐야 해. 세상 무협지는 전부 다 읽겠다는 기세로 맹렬하게 읽어야 해. 그러다가 점점 물리고 색다른 재미를 찾게 될 거야. 탐정이나 모험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세계 명작을 탐독하게 된단다. 훌륭한 작가들이 쓴 제인 에어 같은 고전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지. 사람이 느끼는 재미는 각자 다르고 시절에 따라서도 달라져.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어. 어제 재미있던 것이 오늘은 그저 그런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지. 당연하지. 그건 좋은 신호야. 여러분이 성장한다는 건, 그처럼 매번 다가오는 단계마다 숨어있는 재미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걸 의미해. ”
선생님은 우리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중이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재미라고 말씀하셨다. 각자 자신에게 재미있는 책을 선택하라고 강조하셨다. 이보다 더 좋은 독서 교육이 어디 있을까 싶다. 교육적으로 훌륭한 권장도서인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선생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책’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누구의 기준에서 좋다는 의미인지? 그런 관념적인 교육 철학과 비교하면 이상주 선생님의 “재미 독서론”은 우리에게 명쾌하고 기분 좋은 독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선생님의 조언은 훗날 내가 여러 분야의 책들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을 고르는 유용한 일차적 기준이 되었다. 선생님의 잔잔한 소신의 목소리는, 지나간 세월의 강을 건너 지금도 내 귓가에 사브작 맴돈다.
책과 기억.
내가 쓰기로 한 브런치북의 제목이다. 책과 얽힌 내 삶의 작고 소소한 여러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을 발굴하여 적어보기로 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지난주 처음 시작할 때에 비교해 지금 마음속 계획은 자꾸 조금씩 변하고 있다. 계획이란 게 뭐 그런 거 아닌가.
뭐 하시는 분인지요?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글쎄,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어쨌든, 요즘은 글 쓰는 사람입니다.
아하, 글쟁이…
네, 전문용어로는 작가라고 합니다.
작가라면, 자기 이름의 책을 두 권 정도 냈나요? 그 정도 해야 작가라고 하던데.
그건 좁은 의미의 작가이고, 넓은 의미의 작가는 오늘 아침 뭔가 썼다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작가입니다.
아, 말하자면, 넓은 의미의 작가이시고, 출간작가는 아니란 뜻이네요.
그, 그렇죠. 저는 출간작가의… 독자입니다만.
누구나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동원하는 것에 주저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거창하게 쓸 마음은 없었다. 책상에 앉을 때만 해도,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감과 짤막한 단상 같은 것으로 어떻게 엮어보려는 심보였다. 그런데, 텅 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니 이게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소감과 단상? 큰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게 분명했다. 하루 저녁 기분 전환을 위해 블로그 포스팅이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하나의 주제 아래 분량이 제법 되는 책을 짜임새 있게 구성한다는 건 다르게 접근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저런 고민만 하다가 일주일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민 덕분에 나름대로 방향을 잡긴 잡았다는 것이다. 궤도 이탈의 역효과로 뒤죽박죽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몇 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책을 읽으며 느낀 감상과 책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을 정리하여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하다. 문득 본질을 깨달았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에게 설득하려는 것이다. 나름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왔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정말 그래? 글쎄, 그걸 이제부터 알아보자고. 결국, 내 이야기를 써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미국의 비평가 비비언 고닉에 따르면, 과거에 남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은 앉아서 소설을 썼는데, 요즘 21세기 사람들은 회고록을 쓴다는 것이다. 삶에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보다는 삶에서 직접 가져온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라고. 1) 바로 그렇다. 내가 쓰려는 게 추억담 뭐 그런 것과 비슷하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꺼내는 것. 내 삶에서 직접 가져온 것. 하지만 아무리 사실에 근거하는 이야기일지라도 허구적인 상상력이 마구 뒤섞이곤 한다. 내 경우에는 어떤 글을 써도 늘 사실과 상상력이 뒤섞였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해석하는 모든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해석에는 늘 상상력이 동원되기에.
둘째, 뭔가 다른 방향이 있었는데, 까먹었다. 책 이야기는 부수적으로 곁들인다는 정도…?
셋째, 뭔가 또 다른 게 있었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구전설화와 만화책, 영화도 다룬다는 정도… 나머지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하.
작가이자 뛰어난 독서가인 아르헨티나 태생 알베르토 망겔은 이야기 속 허구의 인물들이 진짜 육신을 지닌 우리의 친구들보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자신도 그런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고. 그렇다. 어린 시절에 이야기 세상에 흠뻑 빠져든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모두 문학 친구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학 친구, 이 보다 더 다정한 친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망겔은 이들 문학 친구들을 ‘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진 유령’ 혹은 ‘끝내주는 괴물들’이라고 칭했다. 빨간 모자, 앨리스, 슈퍼맨 등 이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지만 우리를 키워 주고 함께 뛰놀아 준 정말 끝내주는 친구들이라고. 2)
나의 첫 번째 끝내주는 괴물 친구는 외할머니가 해주신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닌 여우, 바로 구미호였다. 외할머니의 구미호 버전은 남달랐다. 절대로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 구미호가 아니었다. 나쁜 어른의 간만 빼먹었다. 할머니는 그 점을 특히 강조했다. 에이, 불쌍한 아이의 간 빼먹는다는 건 싹 거짓말이다! 사람 홀리는 사악한 존재도 아니란다. 할머니의 구미호는 우리 아이들처럼 장난스럽고 씩씩하고 거침없었다. 좀 이상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해주는 거의 모든 옛날이야기에 구미호가 항상 출연하곤 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도 제비가 선물한 박을 놀부가 키워 갈랐는데, 그 속에서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것은 구미호라는 식이었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는 선녀가 느닷없이 구미호로 변신했다. 꼬맹이 시절 나는 구미호가 나올 때마다 깜짝 놀라고 너무 재미있다며 마구 웃었다. 할머니는 내가 크게 웃는 걸 무척 좋아하셨다. “이 할미가 바로 구미호닷!”하며 나를 놀렸다. 만약 할머니 버전으로 춘향전과 심청전을 다시 쓴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변 사또는 수청을 받으려다가 간을 잃게 될 것이고 심 봉사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딸이 아홉 개 꼬리를 가졌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릴 것이다. 세월이 흘러, 구미호가 영화로 만들어지거나 여러 드라마로 제작되어 발표될 때마다 나는 애정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구미호가 착한 캐릭터이면 고개를 끄덕였고 사악한 캐릭터이면 눈을 돌렸다. 다행히 오늘날 구미호라는 캐릭터는 할머니 버전과 비슷하다. 장난꾸러기이거나 씩씩하거나 거침이 없다. 그런 신세대 구미호의 모습을 그리는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와 드라마 작가들은 나의 할머니의 정신적 후예가 분명하다고 나는 우정 어린 마음으로 믿는다.
외할머니 영향이었을까. 내 어머니 역시 씩씩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전라도 출신이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고향에 있는, 시댁이라는 호칭을 가진 일가친척 분들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이였다. 두 분은 경상도 어느 곳에서 열차를 갈아탔다. 기차 안에는 당연히 경상도 사람들만 잔뜩 있었고, 특히 젊은 남자들이 당시의 어느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전라도 사람을 욕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참고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웃음과 멸시가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더는 참지 못했다. 아버지가 말리는 가운데에서도, 기적소리 울리며 달리는 열차 한가운데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게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시여! 내가 시방 전라도에서 왔구먼. 전라도가 뭣이 거시기했다고 욕하고 난리인 거여. 다시 욕 해봐. 다시 해봐. 가만 안 나둬븐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꽃다운 이십 대 낭자가 그렇게 씩씩거리며 분연히 외쳤다고 한다. 객차 안의 모든 남녀노소가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고. 어린 시절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할머니 이야기 속의 씩씩한 구미호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도 혹시… 구미호?!
할머니의 구미호 캐릭터 비틀기는 손자인 나를 놀리고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마도, 여자에게 온갖 굴레를 씌우고 하대하던 유교의 나라 조선과 신여성의 출현을 경원하고 조롱거리로 일삼던 일제 강점기의 근대 풍속을 목격하며 조용히 암흑의 시대를 걸어온 구세대 할머니 자신의 바람이 차츰 가미된 캐릭터이지 않았을까. 시대여, 내가 차라리 구미호가 되리라. 사랑하는 손자여, 이 할미는 구습의 간을 빼먹는 구미호란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다시 비비언 고닉에 따르면,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작가가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고.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 3)
나는 누구인가?
누구긴,
다음 호에 밝히겠지만 나는 요괴 인간을 사랑한 꼬마다.
(다음 호 연재는 금요일 예정입니다. 앞으로 화요일과 금요일로 1주 2회 연재로 변경합니다)
나이 첫 번째 끝내주는 괴물 친구 - 구미호
(인터넷 나무위키 등 참조하여 작성)
구미호는 우리나라 문학에서 아직 유효한 소재이며, 한층 더 깊이 있게 탐구하고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가치 있는 캐릭터이다. 영미 문학에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백작이 있고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하위 장르에는 늑대인간과 좀비가 있다. 이들에 대항할 유일한 한국형 어둠의 존재는 구미호가 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구미호는 동아시아 3국(한국·중국·일본)뿐 아니라 베트남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이며 대체로 남자를 홀리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변신하여 등장한다.
춘추전국시대에 편찬된 중국의 산해경에서 구미호는 청구국에서 산다는 언급이 나온다. 주목할 점은 청구국이 바로 한국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여우 신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에서 여우 신령은 한국계일 가능성이 크다고 공인할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미호는 한국이 원조인 셈이다.
구미호는 원래 고대에서 내려온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옛 문헌에 따르면 우(禹) 왕은 구미호를 보고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아홉 개의 꼬리는 자손의 번창함을 상징했다고 한다. 꼬리는 원래 하나인데 털이 무성하게 자라나 아홉 갈래로 갈라졌다는 설도 있다.
고려의 영웅 강감찬이 인간 남성과 여우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서는 여우가 지혜와 풍요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아홉(9)이라는 수는 꽉 채워진 것이기에 지나치게 길함으로 의미하며 조만간 액운과 죽음이 따른다는 해석도 나왔다.
이처럼 고대에는 신성한 존재에 가까웠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구미호의 이미지는 남자의 정기를 빼먹는 요물로 변신하고 도인들의 주술에 의해 퇴치되는 괴수의 이미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구미호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과 초창기 누아르 영화에서 흔히 그려진 팜므파탈의 속성을 지닌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30년에서 1970년에 이르기까지 팜므파탈은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여성상이었다. 이들은 살인의 배후자이거나 남성을 유혹하거나 죽음의 총알을 직접 발사하기도 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순화되어 남성과 함께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동반자의 모습으로 변신하거나 비정한 거리를 혼자 거닐며 사건을 해결하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구미호 역시 다양한 캐릭터로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과거의 구미호는 여성에 국한되었으나 최근 우리 드라마에서는 남성으로도 적극 등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요괴와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 독특한 캐릭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층적으로 탐구되길 기대한다.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철학적인 문제의 존재로 더 확장되길 기대한다.
[관련] 할머니의 추억이 담긴 연관글입니다.
https://brunch.co.kr/@ianxpaper/36
1)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마농지, (2023.9) p105
2)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H, (2021.6) p09~30 (* 저자 서문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3)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마농지, (2023.9) p10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