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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Apr 23. 2021

남편의 맛

전원일기 다시 보기-곧 겨울이 오겠지

잠 못 드는 밤!

돌아누운 김 회장의 등 뒤에  "나 좀 봐요" "주무세요?" 아무리 말을 해도 남편은 쿨쿨 잠만 잔다.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기만 하는 밤이 오늘따라 더욱 길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는지 모르겠다.


쌀 수매하러 가는 김 회장이 어머니께 간식거리로 사탕을 사드리마 약속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김 회장 부인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린다.

"우리 서울 갔을 때 큰 사위가 사주어서 맛있게 먹었던 게 죠?"

"중국음식 중에 고기를 튀겨서 쫄깃거리는 거 그게 뭐죠?"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머니 사탕만을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수매를 한 후 김 회장은 동네 이장과 술 한잔하러 선술집에 들른다. 쉰 두부김치와 막걸리 한 잔에 기분을 내던  중, 이장에게서 부인 또래의 동네 아낙이 황망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고생만 하던 아낙은 병상에 누웠다가 죽기 전에 뜨거운 고깃국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고 한다.  고깃국을 맛있게 한 사발 먹고 숨을 거두었다는 말에 집에 있는 부인이 생각났다.


밭에서 일을 하는 김 회장 부인을 건너편에서 남편이 급히 부른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부인을 데리러 온 김 회장,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 남편의 허리춤을 붙잡고  읍내로 나가는 부인의 입엔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읍내 선술집에서 홍어회를 먹으며 중국집의 탕수육까지 배달시켰다. 집에 계신 시어머니와 자식들이 맘에 걸리지만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맛있다. 남편이 날 위해 마음을 써준 것이 정말 고맙다. 맛있게 먹는 부인을 보는 김 회장도 흡족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어귀에서 남편에게 좀 있다 들어오라며 읍내 외출을 비밀로 하려 하지만 이미 읍내에서 두 부부를 본 동네 아낙들에 의해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뒤였다. 그것도 김 회장 부부의 애정행각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설상가상 김 회장은 어머니의 사탕을 깜빡하였다. 시어머니의 지청구는 더 심해지고 며느리 눈치도 보인다.

오늘 밤도 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돌아누운 남편의 등 뒤만 쳐다본다.


김 회장 부인은 인생의 봄과 여름은 지났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다행히 남편은 좋았다. 그렇게 봄이 시작되고 가끔 시어머니 시집살이 꽃샘추위도 매서웠지만 6남매 낳아 지지고 볶으며 우애 있게 자라는 모습이 예뻐 여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6남매 모두 결혼시키고 돌아보니 여름은 금세 지나가버렸고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있다.

남편은 봄이 오고 여름이 가도 한결같은 사람이고 동네에서 인정받는 화목한 가정으로 살고 있으니 인생의 가을도 이만하면 괜찮다.


곧 겨울이 오겠지?

이만큼 영글었으니 뿌듯하고 행복하지만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남들도 다 이러고 살 테지,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이 헛헛한 게 이게 뭔 대수일까 싶다. 이렇게 살다 보면 또 지나가겠지.

 

그렇게 겨울이 와도 이젠 괜찮다.

겨울이 아무리 춥고 눈보라가 친다 해도 난 괜찮다.

갱년기를 달래준 탕수육과 홍어회는 정말 맛있었다.

다정함을 표현하는 남편이 있어 좋다.

잠이 오지 않는 긴 밤, 이리저리 뒤척여도 행복하다.


나는 호르몬제 복용을 중단하고 바로 갱년기가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강도가 약하긴 하지만 밤이 되면 잠을 못 자고 너무 더웠다. 남편은 김 회장보다 더 잘잔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얼른 자"라고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잠으로는  남편이 김 회장보다 한 수 위다.


김 회장 부인처럼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열감이 올라 더워 죽겠다고, 너무 힘들다고 동네방네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냈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내 인생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갱년기를 빌미삼아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였다.


남편은 김 회장보다는 드러내 놓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먹고 싶다면 무엇이든 사다 주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입맛에 맞춰 무엇이라도 먹게 해 주는 사람이다. 예쁜 여배우가 선전하는 갱년기에 좋다는 제품을 사 오고 퇴근길에 군것질거리 등으로 나의 마음을 달래주어 나의 요란한 갱년기 증상은 진정되어 가고 있다.


김 회장 부부가 살던 그 시절이었다면 남편은 김 회장처럼 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일일 게다.

요즘 시절에 살고 있는 남편이라 다행이다.


며칠 전 친정엄마와 통화하던 중, 여동생과 엄마가 쑥을 뜯어 쑥떡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협력교사로 다시 일을 하게 되면서 조금 힘이 드는지 몸살도 앓고 있었다. 입맛도 없고 해서 그런지 직접 뜯은 쑥으로 만들었다는 쑥떡이 먹고 싶었다.정말 맛있겠다며 남편에게 쑥떡 이야기를 했다.


현관 앞에 택배박스가 쌓여있다.

스티로폼 박스에 해풍 맞은 쑥으로 만들었다는 쑥떡이 노란 콩고물과 함께 들어있다.

종이 박스엔 흑사탕 스무 봉지가 줄 맞춰 누워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이 주문한 것이다.

쑥떡은 내가 노래를 불렀고 흑사탕은 내가 아플 때 찾는 나의 최애 사탕이다.

쑥떡과 흑사탕이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만하면 내 남편도 김 회장급이다.


나의 봄은 꽃샘추위도 없었다.

맞벌이를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느라 종종 대던 여름을 보냈지만 김 회장 부인처럼 힘들지 않았다.

당시 쉰여섯 살의 김 회장 부인은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맞이하는 중이었지만 예순을 앞둔 나는 아직 가을이다.

나의 겨울은 아직 멀었지만 겨울이 온다 해도 나도 괜찮다.

나에게도 홍어회와 탕수육 못지않은 쑥떡과 흑사탕이 있다.

쑥떡과 흑사탕은 정말 맛있다.


 그 시절의 홍어회와 탕수육,

오늘의 쑥떡과 흑사탕,

다정한 남편의 맛,

1 가정 1 김 회장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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