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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27. 2019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에펠탑 꼭대기에서 접어 날린 비행기가 아버지의 묘비에 내려앉는 이야기'

The Extraordinary Journey of the Fakir  2018 - 켄 스콧




개연성


점A와 점B 사이에 직선을 긋는다. 평소에 미술에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듯한 선을 긋기 위해서 자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A와 B 사이를 지나는 직선은 오직 하나다. 우리는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누가 선을 그어도 같은 모양의 직선. A와 B를 연결하기 위해서 그 누가 어떤 도구를 동원한다고 해도 그 모양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개연성'이라고 불러보자. A와 B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선, 꼭 그런 모양의 직선이 필요하다는 사실.


해외 여행을 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비행기 값과 숙소, 음식을 위한 돈, 직장이나 학교에 지장이 가지 않을 시간, 발행까지 2~3주 정도 걸리는 여권... 그 외에도 그 나라에서 버스라도 타기 위한 언어실력이나, 여행 경험이 없는 나를 이끌어줄 친구나 가이드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하더라도 필요한 것들이 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 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사려고 했던 컴퓨터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우리집 고양이를 맡아 줄 믿을 만한 사람, 휴가를 낼 수 있을만한 적절한 타이밍...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려니 머리가 아프다. 지금 내가 있는 세계의 중력은 너무나도 강해서, 겨우 며칠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단지 옷장 안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느 날 내가 영국으로 가게 된다면? 사람들은 말한다. 에이 그런 일이 어딨어. 공항에서 엑스레이만 찍어도 바로 걸릴 텐데. 셔츠에 글을 몇자 적은 것 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이뤄 줄 만큼의 엄청난 돈을 번다면? 남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올라탄 기구를 타고 지중해를 건넌다면? 그러다 가스가 떨어져 추락하다가, 하필이면 리비아를 향하는 배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진다면? 그건 좀 허무맹랑한데. 개연성이 없잖아 개연성이.


 


졸려서 끄덕이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들고 눈에 힘을 줘가면서 필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반듯하게 적혀있어야할 강의 내용 대신 언제 그렸는지도 모를 지그재그의 낙서가 노트에 가득하다. 내 펜이 A와 B 사이를 잇기 위해서 움직여야할 그 짧은 거리 사이를 엉망진창으로 여행하고 있는 어떤 움직임. 그것은 꿈 속에서 그린 선인가.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이란 현실과 소망의 타협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종종 꿈을 꾼다. 꿈의 내용들은 대부분 허무맹랑하기 마련이다. 코코아가 문득 먹고 싶어서 지하철 기관실을 찾아간다든지,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곰을 타고 달리기도 한다. 개연성이 붕괴된 곳에서, 지그재그의 기묘한 서사가 이어진다. 어째서 꿈의 법칙이란 그런 것일까. 왜 개연성은 항상 꿈에서 그 힘을 잃을까.


그것은 우리가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란 단어에는, 'Dream'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지만, 언제나 두 가지 뜻이 있다.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우리는 '바라는 것'을 '꿈'꾼다. 우리는 개연성으로부터 안정감을 얻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산산히 부서진 세계를 꿈꾼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지그재그의 불규칙한 분양에 매료되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일에는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디 있어, 라고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하곤 하지만, 가끔은 에펠탑 위에서 편지를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가 수십년 전 헤어진 어머니의 남자이자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던 아버지의 묘지 위에 틀림없이, 사뿐히 내려 앉는 그런 이야기를 꿈꾸곤 한다.


아주 멀리 돌아가는 A->B



100유로짜리 위조지폐 한 장으로 유럽을 누비고 다니는 이 이야기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렇게 했을 때만 나오는 그 서사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개연성이란 족쇄를 별다른 고민 없이 벗어 던져버리고 보여주는 이 발칙한 동선에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A에서 B를 잇는 것이 최단거리의 직선이 아니라 비효율적인 곡선일 때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 경우는 그 곡선이 그리는 무늬가 충분히 매력적일 때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의 무늬는 분명 매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스몰 뮤지컬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이 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영국 경찰서에서 시작된, 장르를 어색하게(그러나 분명히 의도된 그 어색함) 비틀어제끼면서 드러나는 음악 영화로서의 모습은 밀입국자 구류소의 빨래장면, 바르셀로나의 현란한 파티장을 거쳐 리비아 난민촌 부두의 작은 공연에 이르며 매력을 더해간다. 특히나 가장 매력적인 바르셀로나의 파티장(그리고 아자의 현란한 춤솜씨)의 폭발적인 흥과 비중에도 불구하고, 결코 '음악 영화'라고 할 필요는 없을 정도의 영리한 분배 솜씨가 오히려 이 영화에서 음악의 미장센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질감' 또한 마찬가지다. 인도의 누추한 경찰서와 아자의 동네 빨래터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역시나 예쁜 에펠탑과 모던한 매력의 이케아 가구점, 사무적인 영국의 경찰서, 고전적인 매력의 로마 트레비분수, 몽환적인 지중해 구름 위를 떠가는 허니문 벌룬, 황량하면서 따뜻한 리비아의 난민촌을 오가며 정말로 다양한 질감의 영상들을 보여준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이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려는 것처럼 다채롭고, 하나하나가 매력적이다.


어떻게 보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자의 여행은 그러나 여러 인물들(택시 운전사 쿠스타프, 마리, 난민 위라즈 등)과 아이템들(마리의 볼펜, 엄마의 화장 가루, 유로화 지폐 등)로 인하여 정교하게 교차연결되어 있으므로, 나름 '질서'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졌다. 비록 그 모든 것들은 대부분 '발칙한 우연'에 기대어 있지만, 이 영화의 플롯이 애초에 '경찰서에서 감옥에 가기 직전의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다소 과장하여 들려주는 아자의 이야기'라는 알리바이를 마련하고 있으므로, 관객의 입장으로서는 개연성에 대한 불만을 잠시 내려놓고 '안심'하고 그 즐거운 세계의 무늬를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발칙한 마술을 부리며 유럽을 여행하는 아자의 유쾌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지그재그의 현란한 무늬를 그리며, 마침내 편지로 접은 비행기는 아자의 아빠의 묘비에 사뿐 내려앉았고, 이야기는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A에서 B로. 그 중간의 이야기들을 믿느냐 마느냐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여전히 그것이 허무맹랑하다며 개연성의 손잡이를 꼭 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마는). 그 무늬가 얼마나 즐거운가, 그것이 충분히 만족스러운가가 이 발칙한 세계관의 유일한 문제이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그것에 만족했다.


꽤나 오랜만에, 즐거운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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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았던 장면은 어린 아자가 '신'을 만나는 장면이다. 벽돌 하나가 빠진 감옥 벽 너머에서 들어오는 노란 햇빛. 그리고 목소리. 그 목소리가 만들어주는 세계. 그리고 그러리라고 예상했음에도 보았을 때 의외였던 그 '신'의 앙상한 손. 거리에서 만난 눈먼 그의 실체. 그 장면은 '발칙'하게만 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의 가장 중심에 무겁고 차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영화는 '엉뚱하고 기발하게 보이는 것'에 집착하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일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다. 정도를 유지하는 매력적인 동선.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 인상 깊은 음식은 역시 지중해 위 허니문 벌룬에서 먹는 보라색 마카롱.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도 가장 '높은' 지점에서 먹는 그 음식의 식감은 묘하게 현실적이다. 딱딱한 현실이라 생각하고 씹으면 구름처럼 부서지는 식감. 그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이 마카롱 말고 도대체 무엇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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