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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l 21. 2019

[영화] 알랭 뒤카스: 위대한 여정

'정치적 요리사'

La quete d’Alain Ducasse 2017 - 쥘 드 메스트르




당신은 요리로 정치를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질문에 알랭 뒤카스는 답한다. 아니요, 저는 단지 손님이 맛있는 것을 먹길 바랄 뿐입니다.


정치적 요리사


요리는 정치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날마다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는 그 행위가, 생존에 필수적인 행위를 넘어서, 어떤 '구호'나 '슬로건'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까. 내 배를 채우는 것 이외에, 내 혀를 만족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알랭 뒤카스는 쉽게 말한다. 그저 손님이 맛있는 걸 먹길 바란다고.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그가 하는 일은 묘하게도 그것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지금 현재 21개의 미슐랭 스타를 가지고 있다는 이 정점의 거장 요리사는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다. '손님이 맛있는 걸 먹게 하는 방법'에는 단지 직접 요리를 하는 것 외에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그는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관찰하고, 식재료 산지를 찾아가고, 메뉴를 평가하거나 조언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주방 건축에도 관여한다. 


이 모든 것이 '요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연장선에 있기는 하지만, 그가 직접 말한 것과는 달리 그의 행위는 점점 정치적인 것들을 향한다. 그는 고기를 적게 쓰고 해산물과 채소 위주로 사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분명 메시지적인 부분이 있다. 그는 또한 재료 본연의 맛을 중요시여기는 현대의 가치관(누벨 퀴진)의 선봉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재활용한 음식으로 요리를 하는 운동을 지지하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레스토랑을 오픈하며 그가 추구하려는 방향에서는 고전적 취향과 엄숙주의를 지향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맛있는 것'을 만들고, 손님에게 요리로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가 만드는 '맛있는 것'의 의미는 꽤나 정치적이다. 그는 실은 '맛있는 것'을 넘어서,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 혀를 거쳐 식도를 통해 넘어가는 그것을 넘어선 그 무언가에 대한 자신만의 청사진을 그리고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분명 정치적 요리사이다. 굳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적 개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정치에 연루되어 있다. 꽤나 적극적으로. 


슬로건으로서의 요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요리'를 먹는 사람, 그리고 '끼니'를 먹는 사람. 


온갖 맛집을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 애쓰고, 지루한 음식들을 벗어나 혀에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순간을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구내식당을 즐겨찾고 '오늘은 뭘 먹을까'란 고민을 사치스럽게 생각하며 뭐로든 적당한 것으로 때우고 조금이라도 빨리 훨씬 가치있는 자신의 업무로 복귀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솜씨가 좋지 않은 구내식당의 가장 지루한 메뉴에도 마늘을 빻아 설탕 간장과 함께 고기를 조려내는 불순한(?) 노력이 들어간다. 양배추를 자르고, 밥을 볶는다. 식재료를 있는 그대로 섭취하지 않으려는 그 본능의 한쪽 끝에는 후라이팬에 기름이라도 둘러서 달걀을 부치는 자취생의 최저의 노력이 있을 것이고, 그 반대쪽 끝에는 파인 다이닝이니 하이엔드니 하는 궁극적인 노력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레스토랑의 식탁에서 마주한 거장의 요리 저 너머 어디엔가엔 그가 추구하는 철학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어떤 이상향이 있을 것이다. 


<알랭 뒤카스: 위대한 여정>은 단순히 요리나 요리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런 이상향을 바라보는 여정이다. 그가 추구하는 요리의 끝에는 그가 추구하는 세계가 있다. 그저 손님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추억을 가지길 바랄 뿐입니다, 라고 세계적인 거장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몹시나 정치적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묘사하는 알랭 뒤카스라는 인물의 이면에는 언제나 '익숙한' 슬로건이 따라다닌다. 최고의 재료가 최고의 요리를 만든다, 재료 본연의 맛이 중요하다, 손님이 요리를 먹는 경험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사어가 된 이 슬로건이 그 분야의 정점에 다다른 거장의 목소리에 담겨 힘과 권력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파인다이닝 요리들(주로 손님의 앞까지 가져와 작은 컵에 담긴 소스를 붓는 것으로 묘사되는)은 그런 슬로건의 포스터처럼 느껴진다. 그 요리들은 뭔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맛있는 것이 여기에 있다', 가 아니라 '이런 것이 옳은 것이다', 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내게 무척이나 건조하게 다가왔다. 영화에 나오는 음식들을 항상 기록하는 내가, 이 영화에 범람하는 음식을 보면서도 군침을 흘릴 수 없었던 것은 (물론 파인 다이닝에 익숙하지 않은 내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그것들이 그저 '전시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음식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인 '욕망'을 제거하고, 현란한 음식들은 누군가에 의해 섭취되기 전에 슬쩍 접시만 보여진 채로 다시 퇴장해버린다. 


오늘날 수많은 인터넷 요리 방송들이 예전처럼 레시피를 소개하거나 요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섭취하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바뀐 건(그 '먹방'이 요즘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우리가 '요리'와 '음식'이란 것이 혀와 위장에 직접 닿는 본질적인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글부글 끓는 것, 꿀꺽 삼키는 것, 바삭하게 튀기는 것, 한입 깨물고 입술에 묻는 기름, 은색 숟가락에 아찔하게 부서지는 예쁜 샤베트, 요리사의 지문이 닿는 새우살, 기어코 맨숟가락을 한번 더 빨게 만드는 중독적인 소스. 그런 욕망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위대한 여정'으로 가기 위한 구호들과 어떤 '운동'처럼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들이었다. 


그리하여 영화를 다 보고 새삼스럽게 혼자 생각한 질문은, 요리란 무엇인가? 라는 것. 


요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원재료의 향에 흠뻑 취하고 토끼처럼 조곤조곤 씹어 맛을 탐구하는 그런 장면들만 보게 되다가, 문득 침이 고인 적도, 머릿속에서 냄새가 떠오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랭 뒤카스가 비록 기대하던 괴짜 거장의 이미지 같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정석적인 거장 요리사 캐릭터였지만, 그것이 곧바로 '지루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영화의 후반에 그가 추락한 비행기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몇십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이 영화의 시작이, 알랭 뒤카스리는 최정상급 요리사의 포착이 바로 그런 곳에서 시작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영화는 이 사람을 너무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루하게 다뤘다. 중요한 포착이 있었더라도, 아마 영화는 처음에 정했던 방향으로 그를 계속 바라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새삼스럽고 건강한 슬로건. 


모든 감각에 맛있는 기억을 남겨주고 싶어요. 


아, 군침이 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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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에 음식 영화니까, 기억에 남는 음식을 말해보자면, 계란을 올린 장어덮밥. 안타깝게도 알랭 뒤카스의 요리가 아니다. 요리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막다른 길에 봉착한 현대 서양 예술이 동양에서 매너리즘을 탈출할 영감을 얻는 경향이 자주 보이고 있다. 주로 그 대상이 되는 국가는 일본인데, 분명 일본은 새로운 대안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큼 자기네들의 문화를 참 열심히 발전시켰다. 누벨퀴진 요리사들의 입장에서 일본의 요리문화를 처음 봤을 때 그야말로 황금광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 시즌이 살짝 지나서 아무도 찾지 않는 딸기 체험장에 가서 오래 익은 딸기를 현장에서 뚝 뜯어 먹어본 적이 있다. 그 싱그러운 풀맛이 섞인 농익은 단맛의 복잡한 매력은 정말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내가 방금 먹은 그 딸기를 그냥 접시에 다섯 개 정도 올려 놓기만 하더라도 정말 최고의 요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싱싱한 것이 레스토랑의 식탁에 오르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모든 재료를 자기 소유의 텃밭에서 방금 수확하여 요리하는 레스토랑이 있지 않은 이상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상업과 유통이 중간에 끼이는 이상, 궁극적인 요리는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원재료의 맛,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영역의 요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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