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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Oct 03. 2019

[영화] 조커

'구정물을 밟는 자들의 예수'

토드 필립스



히스 레저가 <다크 나이트>에서 전설로 남을 조커 캐릭터를 남기고 떠나버린 이후로, 이 자리는 독이 든 성배처럼 남게 되었다. 그 누가 와도 히스 레저의 인상 깊고 독특한 조커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깊어졌고, 불행히도 정말 부담스러운 타이밍에 등장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제러드 레토가 그 독이 든 성배를 마셨지만, 영화의 문제인지 무엇의 문제인지 모르게 너무나 강렬한 선례의 안타까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이것을 두고 그가 그저 '다른' 조커를 연기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런 부담스러운 공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잊어갈 무렵, 불현듯이, 심지어 '조커(Joker)'라는 이름을 대문에 달고 당당하게 등장한 이 영화의 소식에, 나는 애써 기대를 스스로 억눌렀다. 이 영화에 관해 개봉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좋은 평가들을 듣고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더욱 순수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즐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조커>를 보러 갔다. 관람석에 앉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의 시대 배경도, 심지어 이 조커가 배트맨에 나오는 그 조커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개봉일은 공교롭게도 생일날이었고, 고마운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하루종일 거의 혼자였고, 올라오는 태풍 때문에 비와 바람이 심해서 이리저리 날아가려는 우산을 꼭 쥐고 불 꺼진 도로를 걸어 심야영화를 보러가는 길은 조금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런 것들을 다 양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커>가 분명 근사한 생일 선물이 될 것이라고. 아무튼 그럴 거라고. 


웃음:)


우리는 언제 웃을까. 기쁠 때? 웃길 때?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을 때? 아니면 누군가가 몹시나 우스꽝스러울 때? 


해학은 때로는 폭력적인 권력에 대응하는 힘없는 자들의 무기가 되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것은 유독 잔인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웃음을 당해 마땅한 자들을 향해 마음껏 풀어지는 그 허가된 폭력성은 거리낌도 반성도 없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손가락 끝이 향한 자리에 보이는, 무대 위의 광대 한 명일 뿐이다. 웃음을 당해 마땅한 자. 윤리의 구속에 억압 당했던 사람들의 잔인성은 고삐 풀린 말처럼 마음껏 쏟아진다. 


영화 <조커>에서 웃는 것은 누구인가? 조커라는 캐릭터의 웃음을 해석하는 방법은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다양했지만, 이 영화에서 조커인 아서가 웃는 이유는 그냥 병 때문이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의 삶을 망쳐놓는, 발작적인 기침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기침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그는 기침을 하는 대신 웃고, 기침을 해야 할 자리에 웃음이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에서 도저히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만약 아서의 웃음이 들어갈 자리에 기침이 들어갔다면, 그는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가엾은 사람이었을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쪽은 오히려 아서 쪽이다. 그는 사람들의 웃음을 배운다. 그들이 재밌어하는 농담을 메모하고, 그들이 웃는 타이밍을 따라잡으려 노력한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웃는다. 그가 코미디언이고, 그가 광대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전혀 웃기지 않다. 애초에 아서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웃는 맥락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다. 그가 무대 위에서 낡은 노트에 기록한 메모를 보고 아무도 웃지 않을 이야기를 코미디랍시고 꺼내며 혼자 발작적으로 웃을 때(그것은 물론 병 때문이었지만), 관객들이,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가 긴장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서의 그 행위가 전혀 '약속된 종류의 것'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의 '예측 가능한 약속된 삶'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위로의 박수나 호응조차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이해 불가능한 아서의 세계. 그것의 출현에 사람들은 긴장하게 되고,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위협받는다. 



그것을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것은 머레이의 유머 감각이다. 그는 재앙이 되어버린 아서의 코미디를 진짜 코미디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바로 코미디극을 넘어서 아서라는 인간 그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보고 다시 웃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아서를 맥락과 분수를 모르는 얼뜨기라는 캐릭터로서 이해한다. 그로 인해 긴장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안심'한다. 자신들의 문맥 속에, 그가 포섭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해 속에는, 아서가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수집하고 연구한 그의 코미디의 내용 따위는 사라지고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세계는 어떤지,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그를 굴러가게하는 법칙이 무엇인지도. 


그는 이제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처리'되었다. 웃는 것은 '사람들'이다. 아서도, 조커도 아니다.


구정물을 밟는 자들의 예수


아동 병원의 코미디 공연에 권총을 품에 숨기고 다니는 광대를,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치료하거나 격리되는 수밖에 없다. 아캄 수용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나온 광인들의 배 '나렌쉬프'처럼, 세상에는 그렇게 위험하고,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개선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존재들을 격리(그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으므로)시키는 공간이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러한 격리 공간은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웃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의 서술이다. 그들은 절대적 다수의 세계를 벌써부터 합의 하에 만들어놓고, 그곳의 도로 위를 다니는 사람들만을 인정한다. 약속된 방식으로 길을 걷고, 약속된 방식으로 물건을 사고, 약속된 방식으로 웃는 사람들. 


그러나 세계엔 전혀 다른 동선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웃지 말아야할 타이밍(사람들의 기준에 의하면)에 웃는 사람, 냉장고에 들어가는 사람, 아동 병원에까지 권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 누구도 웃지 않을 농담을 하는 사람. 망상에 빠져 계속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 잠금 걸쇠에 손이 닿지 않는 사람. 아무도 가지 않는 골목길로 다니는 사람. 누구도 보지 않는 구석진 장소에서 억울하게 얻어맞고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광고판 일을 하고,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사랑을 하고(싶어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 


영화 <조커>가 무엇보다 잘 묘사해낸 것은 바로 그런 동선을 가진 어떤 한 사람으로서의 조커를 너무도 잘 구성해냈다는 것이었다. 빌런들에게 나름의 과거와 사연을 부여하는 행위는 그것이 이미 뻔한 클리셰적인 문법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가 조커처럼 미친놈에게 '개연성'을 부여한다고? 그것에 성공하더라도, 혹은 실패하더라도, 어느쪽이든 가능한 비판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아서가 토마스 웨인의 숨겨진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감상에 있어서 큰 위기였다. 어머니가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몰래 뜯어서 읽어보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분노하는 아서를 보며 나는 이 영화가 아서라는 캐릭터에게 너무나 합당한 분노의 이유를 단순하게 던져준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그 또한 결국 전혀 다른 동선을 지닌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부당한 위선자들로부터 버림 받은, 운이 나빴을 뿐인 또 하나의 영웅신화적 혈통의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캄 수용소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진료기록을 훔쳐보며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된 그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을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그는 운이 나빴을 뿐인, 부당한 대우를 받은 그런 신화적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정말로, 구정물속에서 자라난, 미래가 없고, 암울하고, 파괴적(자기 자신이든 주변 사람들이든)인 그런 캐릭터였다. 토마스 웨인의 숨겨진 자식도 아니었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스런 자식조차 아니었던 그는 부당함을 호소할 마지막 건덕지도 없는, 꿈도 희망도 정당함도 없는 세계의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조커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웨인이 범죄행위로 인한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도하며 앞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영웅신화적인 서사 속에서 배트맨으로 성장해갈 때, 여기 이곳의 아서는 지저분한 동네의 구정물을 밟으며 계단을 타고 내려와(아, 계단신에서 바닥을 밟아 구정물이 튀는 그 장면은 당분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세계,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어떻게든 '처리'되어야할 운명(논리)밖에 남지 않은 그 이해불가능한 세계만을 변호하기 위해 '조커'가 될 것이다.  


처리되는 것을, 격리되는 것을, 이 세상의 질서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아무도, 그의 소중하고 지저분한 그 메모의 내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와 같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질문들로 그를 '처리'할 뿐이다) 것을 스스로 거부한 그런 사람들에게도, 물론 구원자(메시아)가 필요하다. 비록 그 구원자는 동방박사의 경배도, 천사들의 축복도 받지 못하는, 아무런 징조도, 당위성도 없는 부적격한 구원자이지만, 그들 자신의 세계를 변호하기 위함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세계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그런 구원자의 등장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매장' 라파엘로


그리하여 이 영화는 '구정물을 밟고 다닐 수밖에 없는 동선의 사람들'의 메시아로서의 '조커'라는 캐릭터의 탄생을 알린다. 머레이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호송되다가 사고난 경찰차 창문으로 군중들에 의해 꺼내지던 조커의 축 늘어진 모습은 물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형상과 닮았다. 비록 첫 번째 살인 이후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숭배되는 현상이나, 머레이의 쇼에 초대되어 별안간 고조된 목소리로 '연설'을 내뿜은 아서의 모습은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불과 총과 폭도의 세계 고담(고담이라는 공간은 언제나 범죄로부터 보호받아야할 선량한 '시민'과, 범죄 행위에 가담하는 범죄자로서의 '시민'들이 공존한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에서 결국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새로운(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메시아가 된다. 깔끔하게 '코믹'과 '배트맨'이라는 고정적인 상수를 잘라낸 세계에서, 나는 마음껏 조커의 세계를 즐겼다. 그것은 정말로 잘 구성된 세계였고, 답을 내릴 수 없는 어떤 딜레마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내 마음 속 히스 레저의 그것에 비길 만하냐고? 글쎄... 넘어서지는 않을지, 그것을 걱정해야할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조커는 <다크나이트>로 태어났고,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죽었고, <조커>로 다시 부활하였다. 이제 또 독이 든 성배는 어디로?






(이미지출처 : https://movie.naver.com/https://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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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는 음식. 음식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혀에 발랐던 그 하얀 페인트의 맛(?)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 호아킨 피닉스는 놀라운 배우다. 나는 <Her>를 보며 테오도르가 <글레디에이터> 콤모두스라고?? 하고 놀랐고, 이제 <조커>를 보면서 아서가 테오도르라고?? 하고 놀라고 있다. 눈을 씻고 봐도,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 개인적으로 세 조커를 비교하자면 그렇다. 앞의 두 조커에 비해, <조커>의 조커는 인체를 공부하고 그린 그림체의 조커인 것 같다는 느낌. 그저 '사연'이라고 할 수 없는, 조커 이전의 '아서'라고 할만한 어떤 세계가 이 영화에 있었다. ....물론 인체 생각하지 않아도 무척 근사한 그림체가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분명 아서의 승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크나이트>의 조커 동영상을 찾아보니 또 빠지게 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뭐랄까, '치기'라는 요소가 많은 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좀 부담스러울 뿐. 


- 영화를 보고 나면 가끔 다시 보고 싶은 장면들이 있다. <조커>의 계단신은 수십번 넘게 찾아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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