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척을 해요.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어둑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2층 구석자리에 맥락도 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물음을 들은 S는 흠칫하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눈을 껌뻑거리더니 이내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반복하다 보면 빠지지 않을까요...?"
입사 후 N번째 소개팅이었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영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다' 정도. 누군가는 N0, 심지어는 N00번째 소개팅에 가서야 비로소 짝을 찾으니 버티라고 하는데 이미 N번째에 기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사진과 간단한 소개를 교환한 후, 카톡방에서의 어색한 인사 두어 번이 오가고 만남을 약속한다. 속전속결파는 카페에서 승부를 내고, 맘에 들면 저녁 늦게까지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의 반복. 그 속에서 나는 기계처럼 긴장하고 잠깐 설렜다가 실망하기를 반복.
태엽을 감으면 정해진 공간 안에서 똑같은 상황을 재연하는 인형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 나는 소개팅을 할 때마다 사랑하는 척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곤 궁금해졌다. 귀납적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1번째 소개팅에 남자를 사랑하는 척했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2번째도, 3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N번째 소개팅에 나왔다. 그럼 나는 사랑에 빠진 척을 N번 하든 N00번을 하든 절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가.
결론 여기까지 다다르자 너무 울적해지고 말았다. 그냥 이 기분을 떨쳐내기만 했으면. 뭔가 어수룩하지만 다정한 눈앞의 남자 S, 내가 사랑하는 척을 하고 있을 N번째 남자 S에게 끝내 처음의 말을 슬쩍 내밀어보았다. 그저 내 귀납적 추론이 틀렸다는 걸, 내가 보낸 N-1의 날들과 앞으로 보낼지 모르는 N00의 날들이 최악은 아닐 것이라는 걸, 내 앞에 있는 S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한여름에 남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최악의 하루를 보내던 은희라면 어떤 답을 줬을까. 김종관 감독의「최악의 하루」는 무명배우 은희가 겪는 말 그대로 '최악의 하루'를 그린 영화다. 은희에게는 이날 세 명의 남자가 찾아온다. 한 명은 남자친구 현오. 다른 한 명은 현오를 만나면서 동시에 만난 운철,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영화의 초반 종로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료헤이다. 그녀가 내릴만한 답을 추리해 보자. 그러려면 이 세 명의 남자와 은희의 관계부터 살펴봐야겠지.
첫 번째로 현오와 은희의 관계다. 현오는 아침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하며 슬슬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신인배우다. 남산에 촬영을 간 현오는 산책로에서 만난 은희와 다정한 말을 주고 받다가 돌연 서로 질투하며 격한 사랑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현오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은희가 현오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료헤이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현오의 연락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쫓아온 운철과 잠깐이나마 추억에 빠지며 눈물을 짓는 모습에서 마냥 그녀가 현오를 사랑한다고 결론짓기는 어려울 테니.
다음으론 운철. 운철은 은희가 현오와 사귀는 동안 바람을 피운 상대다. 운철은 은희와 만날 당시 유부남인 걸 속인 채 은희와 만나다가 아내와 은희 모두 잃는다. 결국은 아내에게 돌아가기로 결시한 운철, 그런데 어쩐지 이별 후 은희의 SNS 계정까지 은밀하게 염탐하며 오히려 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은희가 운철과의 금단의 사랑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느냐 하면 그것 역시 애매하다. 한때는 진심이었을 수 있으나 그녀는 운철을 만나면서 현오를 포기하지 못했고, 운철과의 대화의 거의 모든 대사가 과거형임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미워한다'가 아니라 '사랑했다'라는 말이 있다. 운철과 은희 사이의 설렘은 찰나의 감정으로, 언젠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그 사실만으로도 극 중 현재 시점의 은희를 짜증스럽게 만드는 과거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와의 만남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료헤이와의 의도치 않은 만남에서 묘한 끌림을 느낀 은희는 현오와의 약속도 뒤로한 채 홀린 듯이 료헤이와 카페로 향한다. 둘은 살짝은 엉성한 영어실력을 통해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알게 된 서로의 공통점은 '거짓말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 료헤이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그리고 은희는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에서 최선을 다해 진짜를 가장하여 사람들을 사로잡아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대화가 이 주제로 다다를 즈음 은희는 약속시간이 다 되었는데 왜 아직도 안 오냐는 현오의 독촉 전화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게 료헤이에겐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서 그렇게 다시 현실의 남자친구인 현오에게로 떠난다.
세 남자 사이에서 온통 거짓말만 늘어놓던 은희의 하루는 끝내 모든 것이 들통나며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다. 그녀의 첫 솔직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습용 대본에 있던 독백을 늘어놓을 때가 되어서야 드러난다.
_'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이어 은희는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모두를 속이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고 말한다.
_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독백을 통해 사랑하는 척했던 모든 순간은 그 순간에 한해서 '진짜'라고 이야기하는 은희다. 그렇게 제한된 시간 속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 진한 커피를 마시며 또렷하게 각성을 한다고 말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은희. 그 모습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그의 거짓말과 한 걸음만 물러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실의 경계에 서있었을 은희. 그가 느꼈을 혼란함과 불안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다.
화면 밖의 나는 다시 LP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S와 마주 보고 있다. 진하게 샷을 내린 아메리카노를 들이켠다.
"그러면 사랑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S를 바라보며 말했다. S는 이미 나에게 원하는 답을 주었다. 그럼에도 내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은 궁극의 의문을 해소하고팠다. 나의 도발인 듯 아닌 도발인 저 말에 S는 팔짱을 끼고 몇 초 간 생각하더니 흔들림 없이 답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그 시간 동안은 진짜이니까요. 진짜인 시간이 쌓이면 어느 순간 진짜인 시간이 더 많아질 거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좋아하고 있을 것 같아요."
끝난 것 같은 질문을 물고 늘어진 나처럼, 영화도 은희의 최악의 하루가 막이 내린 이후의 비하인드스토리가 이어진다. 독백을 내뱉고 공허하게 벤치에 앉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희의 앞에 다시 료헤이가 나타난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료헤이와 은희는 둘 다 힘든 하루였음을 고백하며 편안한 웃음을 주고받는다.
이어 둘은 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기지로 결심이라도 한듯하다. 은희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료헤이는 직접 사서 읽어보라며 은근슬쩍 넘어갔던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시간을 보내며 료헤이는 그동안 머리를 꽁꽁 싸매고 고민해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소설의 결말을 떠올리고 은희에게 말해준다. 눈이 내리는 남산을 배경으로 해피 엔딩을 맞는 주인공. 흩날리는 진눈깨비 속에서 마무리되는 소설. 한여름의 남산 속에선 눈꽃처럼 하늘하늘 나부끼는 은희의 춤사위가 료헤이의 마음을 흔든다.
사소한 거짓말이 자리 잡았던 그들 사이의 틈은 조금의 진실된 시간을 보내며 살짝, 아주 살짝 메워졌다. 진눈깨비가 한순간에 함박눈이 되어 펑펑 세상을 뒤덮듯, 틈은 존재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치 S의 말처럼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
S와 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N번째 소개팅,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