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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대규 JELMANO May 31. 2018

디자인, 스타일 그리고 디자이너의 취향

옐마노 패션칼럼(19) - 19FW 아우터 캡슐 창작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5월 27일 일요일 새벽 4시 반입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 세계의 이목을 블랙홀처럼 흡입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대해 뜬금없이 한 마디 남깁니다. 그제 오후 트럼프 대통령의 6.12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공개서한이 있었고, 이 곳 (이탈리아) 시간으로 어제 오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휴전선을 넘어 판문점 북측 회담장소인 통일각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2시간의 실무회담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인, 잠시 전 그 내용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결과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 후 트럼프 대통령은 그제의 대북한 공개 서한의 내용과 정반대로, 그 서한으로 인한 전 세계 언론의 비관적 보도가 무색하게, 싱가포르 회담은 순조롭게 준비중이라는 인터뷰가 급박하게 속보로 타전 되어 옵니다.  



이 글을 여러분이 그리고 제가 한인 회보 지면으로 받아볼 때쯤이면 역사적인 싱가포르 회담이 아마도 열린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6.12 북미 회담은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성사된다는 것에 저의 한 표를 과감하게 (평생 기록으로 남을 지 모를 인쇄매체에 기고하는 글에) 남겨둡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의 시대정신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강한 고리를 어제 비형식적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진 정상회담을 통해서 실존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 시점에서 눈에 보이는 효과는 아니겠지만, 어제의 정상회담을 통해 조선왕조 이후 한민족의 운명을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명의 리더가 합의하여, 한민족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나에게는 뼈 속 깊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문재인 그리고 김정은, 여기에 당선 후에도 대부분 실감하기 못했던 의외의 인물인 트럼프 라는 우리 생에 다시 없을 이 운명의 조합은, 이 후 몇 백 년의 역사를 통해 현대사 혹은 ‘2000년대사’ 중 결정적 변곡점으로 기록될 순간과 계기를 리얼타임으로 목격하게 할 것 입니다. 각자의 명랑한 상상력으로 세기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이 기회의 시간에 대한 나름의 치밀하고 차분한 준비를 시작할 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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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컬럼에서 제가 컬렉션 디자인을 어떤 식으로 시작하는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나름 생생하게 전달 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때 첫 발판이 된 키워드는 Harmonious Discord (조화로운 불협화음) 이었습니다. 웬만한 디자이너라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보는 방법론입니다. 아는 사람을 다 아는, 새로울 것은 하나 없는 변증법적 방법이지요. 일반적으로 또는 통념상 부조화 스러워 보이는 형태나 구조, 또는 컬러와 소재의 낯선 조합을 통해 비교적 새로운 미감을 도출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구체적 모티브로서, ‘도시 속 질감 좋은 범고래 killer whale’ 라는 설정도 그러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살짝 샛길로 뼈져, 이 디자인 창작물과 그 배경을 구성하는 스타일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디자이너는 고래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완성된 디자인을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할 지의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창작과정에서 나는 ‘안전핀’ 개념으로서 만든 가상의 울타리를 만듭니다. 본 창작 과정 전에 조사된, 트렌드 자료 혹은 그런 자료가 굳이 없어도, ‘옷 좀 입는다’ 하는 사람이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유행감’이란 기둥들로 구성된 낮은 목책으로서 구현 중인 디자이너의 새로운 생각 주위를 애 둘러 박아두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창작된 스타일의 성격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이 됩니다.  크게 보면 결국 ‘특수’와 ‘일반’의 관계, ‘구체’와 ‘추상’이 갖는 상호 긴장의 관계인 동시에 보완의 관계입니다. 창작물을 둘러싸고 있는 트렌드 울타리의 영역의 중심으로 갈수록 이 작품은 안전한 디자인이 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집어 입는 평이한 디자인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끄트머리 쪽 울타리에 가까워 질수록 ‘개성적’이라고 평가되는 디자인이 됩니다.  


만약 울타리 위에 삐쭉 올라서 있거나, 한 발이 목책 밖으로 나가 있으면 ‘파격적’이라고 하는 양상이 되면서, 대중의 편한 선택에서 배제되는 디자인이 되어 갑니다. 물론 여기에 트렌드의 방향성이라는 하나의 시간적 차원이 보통 추가됩니다. 그 축의 한 쪽 울타리 근처에는 아방가르드 나 futurism 이 있고, 그 반대편 방향의 울타리 주변에는 retro 라는 형용사 정도로 표현되는 복고적 스타일이 있다고 할 수 있습디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방가르드’, ‘레트로’ 라는 개념은 절대적 시간 축 위의 특정 시대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는 각 시점에서 갖는 상대적인 방향성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봅니다. 최근에는 특정 과거 시점에서 상상한 ‘과거의 미래’라는 개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1982년에 제작된 블레이드 러너가 바라본 2019년의 ‘오래된 미래 세계’ 정도가 적당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주구장창 장황한 장광설을 시각적으로 간단히 표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감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나는 ‘나의 디자인’은 어디쯤에 위치할까 궁금해 집니다. 그런데 이 도식에서는 어쩐지 쉽사리 위치를 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디자인한 JIMIBEK 의 대표적인 슈즈 디자인을 한 번 볼까요?





이 신발 스타일의 방점은 레트로인가요, 아니면 아방가르드인가요. 일견으로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울타리 가운데에 놓여있는 쉽고 평범한 디자인은 아니라는 것 정도 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숙고 끝에 축(axis) 하나를 더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타일적으로 일반적인 기준인 Classic 과 Contemporary  (Casual) 로 두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적절한 기준이 되지 못함을 역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스타일적 완성도’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도입된 이유에 대해서는 뒷부분에 다시 나오니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위에 위치 표시를 하려고 보니, 또 다시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타일이 완결될수록, 즉 위의 좌표 평면의 상단으로 올라갈 수록, 울타리의 외부로 나가는 경향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왜곡된 도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타일적으로 완결된 디자인이라고 하여 반드시 개성적이고 튀는 디자인은 아니기 때문에 왜곡입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평면이라는 2차원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 수정하였습니다. 일단 의도치 않게 길어진 이 매핑(mapping) 논의는 여기서 끝낼까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디자인의 위치는 왕점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나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위치한 이 디자인적 위치, 지형적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나는 반대쪽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클래식한 감성의 디자이너에게 ‘지금 시장에서 요구하는 디자인은 ‘힙합 펑크 스트릿’ 이다~’ 라는 파트너 업체 사장의 요청이 있을 수도 있고, 디자이너 스스로가 보기에도 ‘이번 시즌엔 아무래도 저쪽 판이 대세’라는 판단이 들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생각건대 이것은 디자이너가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조절할 수 있는 표층적 수준의 문제라고 하기엔 간단치 않은 근원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겉옷을 갈아입는 것 같은 피상적인 수준의 문제라기 보다는, 피부색 또는 눈, 코, 입의 얼굴 내 위치와 같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변경이 용이하지 않은 유전적 수준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그것은 후천적인 햇빛, 성형수술 등의 영향으로, 어떤 gene 중에 어떤 DNA가 발현될 지는 확정되지 않은 일정한 수준의 불확실성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외부 조건이 아무리 적확하게 조절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세포 속 핵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단백질이 발현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디자이너로부터 발현될 수 있는 고양된 수준의 디자인이란, 한 자연인의 오랜 취향이라는 온천 골에서 가끔 분출되는 온천수에 가깝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서,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손 글씨’ 또는 ‘문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 따라, 교육환경에 따라, 잘 쓰고 못쓰는 수준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 번 굳어진 사람의 물리적인 손 글씨나 화학적인 문체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논의를 보다 간단히 하기 위해, 주로 문맥과 결합되어 그에 녹아 잘 보이지 않는 화학적인 문체보다는, 바로 눈으로 잘 보이는 물리적 손 글씨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의 어떤 손 글씨체가 있다고 합시다. 그 글씨체는 결국 그와 유사한 형태의 다른 글씨체와 함께 어떤 방향성 있는 스타일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면서 뒤 따라오는 스타일의 선구자로서, 라인을 형성할 것입니다. 결국 그 라인 위에서, 개인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미학적으로 잘 쓴 글씨체와 못 쓴 글씨체가 있을 뿐이지요. (이것은 미학적인 기준일 뿐 윤리적 판단 규준이 아니니, 악필 여러분들이 저에게 항의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국 디자이너 라는 직업인이란, 주어진 자신의 취향이라는 선 위에서, 미학적 의미에서는 타인과 차별화되고, 시대적 의미에서는 진화된 취향을 적절하게 시각화하는 임무를 사회적 분업으로서 할당 받은 직업인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이릅니다. 그 결과, 좋은 디자인임을 전제할 때 하나의 디자이너에서 일관적이지 않은 중구난방의 스타일 정체성을 가진 디자인 산출물은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스타일적 변화에 있어서 아예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닐 것 입니다. 의미를 가진 무엇을 표현하는 예술을 포함한 광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일관성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협의의 언어적 측면에서 위에서 말한 글씨체, 문체 이외에도 말투, 혀짧음, 욕설비율 등 일정한 수준은 한 사람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광의의 언어구사자인 화가, 음악가 등의 예술가들에게도 화체, 음체 등이 있는 것이요. 디자이너에게도 그러한 ‘체’가 있을 것 입니다. 그 ‘체’라는 일관성이 유지되는 한도에서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꿈틀’ 하는이동은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현실세계에서는 ‘스타일적 진화’라고도 하고, ‘작가의 변신’ 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 역시 이번 달도 지면 상의 제약으로 위의 신발 디자인 이라는 스타일 정체성에서 ‘꿈틀함’을 의도한 아웃터 디자인 일부를 살짝 공개하면서 이번 저의 컬렉션 teaser 칼럼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이 드디어 미팅날 입니다.

정리해서 바리바리 들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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