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20s Note Archive_02

May 07, 2015

by 이음서가의 빈 잔


일 이 년 전만 해도 나는 곧 내가 굉장히 전문적이며 나 외의 사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즉 소위 임금이라고 받는 게 단순히 내가 일하는 시간만큼 받는 수당이 아닌, 그들이 타인과는 대체 불가한 나를 반드시 붙잡기 위해 쓰는 수단이라 생각했고, 그 최소 단위가 월 이백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했다.


즉, 통장으로 꼬박꼬박 이백만 원이 들어오는 시기부터 나는 온전한 어른이 되는 거야.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토록 원하던 곳도 아니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며, 나 자체도 정신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생각하던 어른이 되었다. 신기하다. 그동안 어딘가에서 사원증을 받거나 명찰을 받으면 곧 죽을 것처럼 엄청나게 일을 했었다. 메소드처럼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던 것 같다. 인턴 사원증을 받고 야근을 하고, 휴무일에도 괜히 들려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오기도 했다. 시험일에도 괜찮다며 나갔다가 F를 맞아도 별생각 없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애사심이 넘치는 신입 같았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 없는 병신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선택했고 좋아하기도 했고, 칭찬을 듣고 예쁨을 받는 건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연장 없이 인턴십이 만료되고, 점장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는 분위기가 되고 아, 이 이상은 안 되겠구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가 선택한 것들이니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술을 무진장 먹고 그냥 다 힘들지, 난 부족하고.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야. 라고 말하곤 이틀 만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처음 이런 일이 반복될 땐 난 정말 사회성이 모자란, 상담 같은 거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했지만 이젠 모든 어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비슷비슷하다는 걸 보며 조금씩 안도한다. 난 이 어른이란 말이 정말로 싫다. 빳빳한 캔버스 위에 정중하게 어 른. 이라고 적어놓고 박박 그어버리고 싶다.


몸에 딱 맞는 교복을 불편해하면서도 어른이 되면 타이트한 펜슬스커트와 앞이 뾰족한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녀야지, 했었는데. 지금도 난 조금만 셔츠가 불편하면 벗어던지곤 헐렁한 코트로 몸을 가리곤 한다. 펜슬스커트 같은 건 정말, 죽을 때까지 못 입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도 알람이 열 개는 되어야 겨우 일어나고, 학교 과제가 두어 개 밀려 있고, 가끔 학원도 빼먹는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어른은 이런 건 아니었다. 김윤아의 ‘Girl talk’를 부를 때마저도 내 스물여섯이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이렇게 뻔하고, 무식하고, 비루하고, 그 와중에 어이없는 재미는 또 가끔 있을 줄이야. 곳곳마다 나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숨어 있고, 그것들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좋아 따라가고 사람이 싫어 빠져나오기도 했다. 가끔씩 좋아하는 책이나 학자를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그곳은 바로 꽃밭이 되었고, 처음 듣는 단어나 관심 없던 직종도 말해주는 사람에 따라 중절모 같은 것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중절모를 쓰고 있는 나는, 사실 꽃밭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좋아하는 노래 하나가 같으면 인연이라 생각했었고 미메시스니, 상징이니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저녁엔 꼭 상대방이 말했던 것들을 적거나, 추천한 것들을 찾아보곤 했다.



[기원] 글로 시간을 견디던 시절

제가 20대에 썼던 노트와 일기들을 다시 정리합니다. (회고나 현시점의 해설은 덧붙이지 않습니다.)

출판사를 시작하며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책을 만들어내고 싶은가’를 생각하다가 예전의 제 노트들이 떠올랐습니다. 기록은 언제나 결과보다 먼저 태어나니까요.


이 시리즈는 지금의 제가 출판을 시작하게 된 생각과 의지를 다지게 해주는 개인 아카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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