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인상파의 작품들이 대한민국에 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림에 빨려 들어가던 당시중학생인 딸아이가 갑자기 내게 걸어왔어요. 투명한 두 눈엔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지요.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아 울 수 있는 저 마음은 무엇일까, 너무도 궁금했지만 당시에 묻지 못했답니다.
여행 가서 미술관을 견학할 때면 깃발과 가장 가까이에 서있었고, 공부하느라 바쁜 고교시절에도 미술책을 늘 가까이하였어요.
그렇게 예술의 세계를 사랑하던 소녀는 이제 성인이 되었어요. 미술을 전공하진 않아도 여전히 그림을 사랑하는 나의 마법숙녀.
언제나 그림 가까이에 사는 숙녀가 이제 그날 울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네바퀴로 굴러가는 나의 음악감상실에 마법숙녀를 태우면, 음악감상실은 '달리는 미술관'으로 상호명을 임시 변경합니다. 평면적인 나의 시선은 평면 위에서도 입체를 담아낸 장인들에 의해 다시금 깊어집니다. 마법 숙녀의 주문으로 펼쳐진 새로운 색채와 구도와 철학들에 의해 차 안이 밝아져 오거든요.
마법 숙녀가 미술관을 가운영하게 된 첫날을 기억합니다. 어느 날 저녁 마그리트에 대한 글을 읽다가 도움을 받고자 아이에게 물어보았지요. 화색을 띄며 다가온 아이가 보여준 세상은, 실제 세상과 의도적으로 유리된 것이었습니다. 보여지는 것의 관점을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은 내 생각 이상으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날부터 아이는 엄마를 위한 노점상을 열었고, 지금은 저의 굴러가는 음악감상실 사용료로 강의를 해주고 있답니다.
마법 숙녀가 작품을 만든 원리를 소개할 때마다 세상을 보는 저의 눈이 바뀝니다.
회색빛 가득 드리운 날, 하늘은 부유층의 휘황찬란한 파티보다 채석장의 먼지를 더 닮았습니다. 이날 일하는 노동자들을 모델로서 등장시킨 쿠르베의 그림을 만나고서, 흐린 하늘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화가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봅니다.
평범하게 지구가 돌아가는 날, 지구에 의한 시차가 아닌 두 눈에 의한 시차를 반영한 세잔을 만났습니다. 있는 대로 그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원근법부터 시작된 장인들의 도전에, 돌아가는 지구 위에서 별의 시차를 느끼며 사는 것이 원대하게 느껴집니다.
햇살이 반짝이는 날, 도시 건물이 조각조각 빛이 나요. 이차원에 종사하면서도 삼차원을 진실껏 담고 싶었던 피카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평면 위에 정면과 측면을 함께 그려 만들어낸 작품의 비화를 들으며, 조각조각 지식을 전달하는 마법숙녀를 찬찬히 바라봅니다. 숙녀의 얼굴이 조각조각 햇살에 빛이 납니다. 나도 글로써 살아있는 숙녀를 담을 수 있을까요.
유화들을 소개해주며 제 눈을 갈아 끼우는 제 딸이 마치 안경사 같습니다. 마법 숙녀가 차에서 내리고 나면 전시된 그림도 하나둘 불이 꺼지며 이내 사라집니다.
그래도 숙녀가 맞춰준 안경은 제 도수에 알맞습니다. 차창밖에 흐르는 빗방울이 유화처럼 흘러내리는 걸 보니 말이죠. 흘러내리는 물을 보며 기름을 연상하는 모순들로 인해 소녀는 그날 울었을까요...
언젠가 글로써 살아있는 소녀를 담고 싶다는 소망으로 '달리는 미술관'은 데굴데굴 굴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