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배달하는 바람이 기어이 우리 집 베란다까지 기어올라왔다. 베란다 창문으로 바람을 조우하다보니거꾸로 흐르는 저 푸른 강물에 닿았다. 강물은 하얀 쪽배를 뭉게뭉게 싣고 공원을 향해 높이높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딸과 함께 산책을 해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은행잎이 노란 딸의 유치원 모자에 숨어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걸었다.
창문 밖으로 보던 푸른 강에는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색색의 낙엽이 가득한 공원으로 간다. 솜털처럼 보드랍고 선선한 추풍이 봄 같이 여린 아이 두 볼에, 그리고 가을길목에 들어선 내 어깨 위로 쉼 없이 흘러내리는 어느 평화로운 오후.
나무의 남은 이파리도, 사람들 손에 든 모든 것들이 시간에 의해 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사라질 얇은 운명들을 잡으러 다녔다.
오래전부터 늦가을이면 색색이 물든 낙엽으로 책갈피 만드는 것을 난 좋아했다. 그렇게 예뻤던 것들이 낙엽이 되어 흙으로 사라진다니 슬프지 아니한가. 딸도 뛰어 다니며 열심히 줍긴 했지만, 더 절실한 마음이 있는 건 아이가 주워온 낙엽을 책 속에 한 장씩 끼우는 내 쪽이었을 거다.
잠시낙엽에 생각도꿰어 끼우고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이 이름을 큰소리로 몇 번이나 불러도, 아이의 목소리 대신 내 목소리만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나무 숲이 아이를 삼킨 건지 내가 숲에서 뱉어져 나온 건지 그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내 속은 환한 지옥이었다. 내 세상은 산소가 빠져 순간 진공상태가 되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나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다른 맥박으로 마구 뛰고 있었다. 두려움에 제멋대로 뛰는 시간 속에서 아이를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슬그머니 그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게는 천금 같던 무게의 시간이었지만 현실에선 5분 정도 흘렀을까. 아이가 멀리서 고요함을 밀치면서 달려오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순간 너무나도 환해진 세상에 좀 전의 똬리를 틀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이곳은 다시 평화로운 어느 오후.
아이의 천진난만한 손안에 붉게 물든 낙엽들이 그득했다. 그러나 이제 내 손에 뭐가 들려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는 내 손으로 아이를 지켜주어야 했다. 아이에게는 보이지 않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그랬기에 나는 일찍 허물어져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나의 울타리를 자책하고 있었고, 아이는 내게 순진하게 낙엽을 들이밀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아이는 엄마의 울타리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무럭무럭 자랐다. 아니 꽃잎같이 곱고 여린 나이 위로 이젠 제법 단단해진 품새가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순간까지 무탈하게 오다니...
새삼 또 다른 은혜의 손길이 존재함을 느낀다. 출렁이는 세상으로 당당히 항해하기 위해 돛을 단 딸아이는 나와 이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처연하게 아쉽고 선연하게 눈부시다.
사라지지 않고 뛰어다닌 건 내 딸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걸 잡으려고 절박한 쪽은 공원 의자에 앉아 있던 그날의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