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해당화도 꽃일 뿐이다

1화

by 지구 사는 까만별



참내, 저 동천띠는 우에 지는 법이 없노.’

공판장에서 흥정을 하던 상인들은 여인을 상대하곤 혀를 찼다. 그을린 도매상들을 상대로도 언제나 제값을 받아내고야 마는 키 큰 여자를 기세로 이길 사람은 장터와 동네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상인들의 볼멘소리를 무시하며 가벼워진 등짐을 이고 집으로 향했다. 가벼워진 등짐과 살짝 두둑해진 주머니조차도 그녀의 귀갓길을 즐거이 해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식구라는 거대한 구멍을 잠시 메꿔 줄 뿐이었다.


두어 시간을 걸었을까, 한낮이 되어 그녀는 집에 도착했다. 사릿문 너머로 새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녀를 유일하게 이겨먹는 수렁. 도망칠 여력 없이 그녀는 방문을 제꼈다.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온 지아비를 보는 순간, 중년 여인은 삭혀오던 울분에서 비릿한 역겨움을 느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줄줄이 자식들을 둔 아비 이건만, 그는 찾는 이가 많다는 핑계로 점점 집을 멀리했다. 배가 고파 울고, 아빠를 찾느라 우는 아가들을 두고도 호인 노릇을 한다고 집을 멀리하던 지아비에게 시집을 온 것도 결국 그녀의 팔자였다. 스스로 선택한 적은 없지만 팔자라 여기고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고, 낮에는 네 자식 먹이기 위해 홀로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바닷가 인근에 자리 잡은 허름한 초가로 시집을 온 여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파도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어졌다.


우릴 버렸다 생각하면 차라리 나은데, 호인은 길고도 잦은 외출을 끝내고 잊힐 만하면 찾아오곤 했다. 세상을 부리려면 돈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는 쥣불도 없는 세간살이를 뺏어 들고 황량해진 집터를 마음껏 쓸어버린 후 사라지는 쓰나미였다. 거친 파도는 제 이름을 중시했지만, 자식의 항아리에 손을 대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건 큰 소리로 애써 덮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알아도 모른 채, 흙 마당에서 포슬포슬 먼지 일으키며 뛰어놀던 아이들은 낯설고도 익숙한 아버지 등장에 오늘따라 반색했다. 그래도 아비가 왔다고 마른 먼지를 펄럭이며 뛰어오는 아이를 맞는 먹색 두루마기에는 술과 분 냄새가 왈칵 풍겼다.


여인은 낯선 분 냄새에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역겨움을 느꼈다. 그런 아비도 반갑다고 뛰어오는 아들을 보면서 오늘따라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늘 져오던 남자에게 그녀는 화를 게워냈다.

술 묵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기집질에 이제 하다 하다 아예 살림까이 채렸능교. 쟈들 알라들 보기 안부끄버요. 사람이 우에 이칼 수 잉능교 야.”

여자의 말에 남자는 발끈하여 벌떡 일어났다.

“이 기 미친나. 서방이 찾아오마 고마븐 줄도 모리고. 니가 직접 봤나, 여 아들도 있는데 짐 머라꼬 시부리노.”

여인도 처음으로 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내도 듣는 귀가 있는데, 평생 모릴줄 알았등교. 당신 눈엔 저 알라들 삐쩍 마른 거 안비요? 하늘이 무섭지도 않능교.”

이기 오늘 디질라꼬 환장했나.”


대차게 펄럭이는 두루마기는 응집된 한을 토해내는 여인을 냅다 파도처럼 덮었다. 큰 키에 마른 체구의 여인은 무자비한 주먹에 피부가 터졌다. 겨우내 해풍의 할큄에도 아랑곳 않던 아이들은 늦가을 한낮에 불어닥친 냉기가 믿기지 않는지, 아버지에게 안기려던 작은 두 손은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입으로 옮겨갔다.

몇 차례 주먹다짐에도 분이 삭히지 않는 남자는 쓰러진 여인의 멱살과 옷자락을 부여잡은 채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지금껏 어린 사형제를 등에 지고 거친 세파에 시달려온 여인은 오늘은 지아비에게 무자비하게 들판 밖까지 끌려 나갔다. 인적 드문 들판에 다다르자 남자는 더욱 거칠게 여인에게 손을 댔다. 남자의 겁날 것 없는 거친 소리와 여인의 끊어질 듯 얇은 호흡 만이 대치하다, 남자는 “앞으로 말조심하라.”라는 말을 내뱉곤 돌아서서 마을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찬 들판에 꼬꾸라진 여인 위로는, 그 어떤 사람들 대신 새들만이 그녀 주위를 빙빙 돌았다.

멍이 되고 피가 터진 온몸 군데군데가 붉게 물들었다. 고단한 시집살이와 남편 없는 살림살이에 새끼들을 생각하며 버텨온 시간도 피가 되어 같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분노의 사내가 사라진 대지 위의 여인은 멀리서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그 소리는 열두 살 때 여읜 엄마 목소리가 시푸른 상처에 때때로 얹히던 파도소리였다.

철썩. 야야 개안나...

철썩. 살다 보면 별일 많다...

철썩. 그래도 니한텐 새끼들이 있잖아. 가들 크는 거 보마 힘든 것도 이자뿐다.

철썩. 근데 새끼들 키우기 전엔 닌도 내 새끼제.


철썩. 내 보러 함 온나.

철썩철썩...

상처를 소독하던 파도소리에 쓰라려 여인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피와 흙으로 검붉어진 옷을 부르튼 손으로 털자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오늘만큼은 원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 강하던 여인을 지게 하는 건 남편이 아니라 엄마였다. 쓰러진 아내 주머니 돈도 털어가는 남편에도, 자식을 위해 살아내던 그녀는 한참을 울고 나서 절뚝거리며 들길을 걷기 시작했다.







P.s 고단한 세대를 지나온 한 고부랑 할머니의 사연을 각색한 글이며, 2화로만 구성할 예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