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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재발명 - 조건부 주체화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사회와 타자로부터 끊임없이 받게되는 혐오와 폭력으로 인해 소수자는 비체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한 수치는 동시에 자긍심의 원천으로 작동해 개인은 자아의 재발명, 즉 수행을 통해 또 다른 주체로 변모하는 주체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는 이상길이 정리한 디디에 에리봉의 수치론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아진다. ‘비체-수치-자긍심-수행-주체화’. 그러나 내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와 자긍심 사이의 생략된 변모 과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수치가 자긍심으로 작동하는 과정이 자아의 재발명인 것이 아닌가? 바꿔 말해 수행에 해당하는 자아의 재발명이 있어야 수치로부터 자긍심으로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선후 관계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101291100001#c2b 여기 첨부된 기사를 차근차근 읽으며 이해가 어느 정도 되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긍심의 초기 상태는 매우 작다. 어쩌면 자신의 퀴어성을 긍정할 수도 있겠다는 작은 가능성이 자긍심의 출발 지점이 된다. 자긍심의 씨앗을 발견한 인간은 자아의 재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아의 재발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지점은, ‘그렇다면 자긍심의 가능성은 어떻게 발견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디디에 에리봉의 경우, 자아를 재발명한 결과물을 ‘지식인으로서의 디디에 에리봉’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그렇다면 ‘랭스’에서 발생했을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창조 가능성’이 그에게 있어 자긍심의 씨앗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 역시 어떠한 조건부 가능성이 아닌가. 만약 부모가 학업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의무교육이 16세까지로 연장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서 그가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면, 혹은 그들이 에리봉을 모종의 이유로 억압했다면 그들로부터의 독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에리봉은 동성애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출구이기보다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출구를 발견하도록 강제(디디에 에리봉, 이상길 역, 『랭스로 되돌아가다』, 문학과 지성사, 2021, 227쪽)한다고 설명하였지만, 그 출구를 발견하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도 확신하기 어렵거니와 그 출구를 발견할지라도 그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는 또 별개의 것이다. 냉정히 말해 그는 ‘운이 좋게도’ 탈출이 가능했을 뿐이다. 그리고 탈출 후에 맞닥뜨린 또 다른 계급적 수치심은, 그의 재발명이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착취’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주체화는 비체화를 향한 투쟁과, 그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점에서 특수하고 고독하며 개인적인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같은 퀴어일지라도 부르주아냐, ‘인종주의적 노동 계급 출신’이냐에 따라서 점하는 입지가 다르고, 다층적인 수치심의 종류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수치심과 자긍심 사이의 낙차는, 어떠한 특권적인 기회나 계기가 있어야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거기다 끝까지 그 사다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강렬한 자기계발의 의지는 필수 조건인 것으로 보인다. 발표문에도 언급된 바, 마치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창조’가 시골에서부터 대도시까지의 탈출로 귀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과정이 ‘자기착취’를 동원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수치심과 자긍심 간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자신을 비체화하는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퀴어적 존재가 수용될 수 있는 집단으로 옮겨감으로써 뒤바뀌는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디디에 에리봉이 대도시에서 맞닥뜨린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기울여야 했던 노력들을 떠올려보면 명료해진다. 에리봉이 말했듯 또 다른 규범 체제로의 편입이 수행의 종착지는 아니겠지만, “각기 다른 공간 이동 과정에 적응하고 시간성을 옮겨 지낼 수 있는 능력”이 그리 쉬이 얻어지는 것도, 유지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아의 재발명은 완수될 수 있는 것일까. 온전한 주체화란 성취될 수 있는 것일까. 기회에 있어 문이라는 것이 존재할 뿐더러 여러 층위의 수행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주체화란 미완의 개념으로도 느껴졌다. 물론 개인에게 있어 주체화란 단연 어려운 과제이자 수련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나는 주체화가 복잡하고 힘겨운 수행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다. 문제는, 퀴어로서의 삶이 정말로 그러한 수행을 ‘강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유를 빙자한 끊임없는 자기계발이자 신자유주의적인 가치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오직 공부만이 탈출의 길이었다. 게이 정체성을 가지고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탈출’이 가능한 것도 특권적이고, ‘탈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특권적이다. 그런 까닭에 디디에 에리봉이 랭스로 되돌아감으로써 해낸 것은, 그러한 특권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금 돌아보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재발명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자신의 삶의 방식을 관철하고 살아온 사람들. 그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사회적 수치에 대해 대면하고 그 근간이 되었던 가족들까지 되돌아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주체화로 나아간 것이 아닐까.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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