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fodq Nov 02. 2024

이 흰 공간이 질렸다.

하얗다.

끝없이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에 질려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스크린이 하얘졌다.

나는 이제 이 흰 공간이 질렸다.

자유를 구속당한 채로 있는 이딴 흰 공간에 질렸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나가고 싶다.

이 흰 공간이 질려버렸다.

내 맘대로 살고 싶다. 아무 부담 없이 살고 싶다.

나 원하는 데로 살고 싶다.

이젠 정신을 놓고 싶다.

시야가 줄어든다. 흰색이 어둡게 변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 정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왜인지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오른다.

죽을 떼에 사랑하는 이도 아니고 여기 와서 잠깐 본 그 남자가 떠오르다니 이상하고 웃음이 나온다.

넌 날 싫어했겠지?

나도 널 싫어해.

흰 공간에 있던 며칠 혹은 몇 분 동안 참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근데 기억나는 건 그 남자와의 일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습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안타까워 보인다.

눈에는 생기가 없다. 웃음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눈이다.

활기찬 목소리가 아니고 나른하게 천천히 말하는 피곤한 목소리다.

깔끔하게 정돈된 겉모습만큼 그의 내면도 똑같이 정돈되어 있을 것 같다.

도저히 웃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사람이다.

살면서 웃은 적 없는 사람 같다.

불행해지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여기 와서 있던 시간 동안 본 그 남자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기억이 거의 되돌아온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일까.

풍덩.

물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기분이 아니다. 이건 실제다.

기분 나쁜 액체가 온몸을 뒤덮는 느낌이 든다.

그대로 빠져들어간다.

빛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심해 속으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으로 헤엄쳐가고 있다.


이전 12화 널 사랑한 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