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도 전에 꿈이 정해지는 사회
오랜만에 티비를 보는데 초등학생들의 꿈을 조사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피디가 물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잔망스럽게 아이는 대답했다.
“검사요. 아빠가 검사라 저도 검사가 되고 싶어요. 사회에서도 힘있고, 멋있자나요.”
아이가 부모님의 직업에 영향받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6~8살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를 앉히시고 진지하게 물어보셨다.
“요한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아는 직업이 한 손가락을 다 채우지도 못 했다. 다만 당시에는 차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차를 타면 어딘가 놀러갔기 때문에 항상 좋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기롭게 답했다.
“택시 기사요. 택시 기사가 되고 싶어요.”
그날 어머니께서는 나를 엄청 나무라셨다. 직업의 귀천의식이 아니라, 검사, 의사와 같은 쟁쟁한 직업을 선택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께서는 운동을 하려고 했던 나의 길도 반대하셨고, 프로게이머, 사업가의 길도 반대하셨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그러셨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표현이 예전에는 심심치 않게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마치 과거 미국이 ‘아메리카 드림’으로 이름을 떨쳤던 것처럼 말이다. 쉽지 않지만 도전의 기회는 평등했고 누구에게나 제공됐다. 지금도 검사와 의사가 사회, 경제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끼침을 생각한다면 어머니의 생각은 틀리셨다고 볼 수는 없다. 배움이 길지 못하셨고 혼자서 인생을 헤쳐오신 관계로 당신의 주관이 삶의 기준이었고, 고집이 강하고 성격도 급하셨지만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한없으셨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탓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운 점이 많다.
본격적으로 꿈을 정하게 된 건 중학교 1~2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나는 전투기,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요동치고 흥분된다. 숭고한 희생과 절제된 질서를 따르는 군인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그래서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자 했다. 지금이야 라식수술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허락하기 때문에 시력에 대한 문제가 많이 해결됐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밤마다 어머니를 도와 로봇을 조립하고, 인형에 눈알을 붙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첫 번 째 꿈을 포기했다.
아무리 좋은 선박과 비행기여도 목적지가 없다면 표류한다는 말처럼, 나는 몇 년간 표류했다. 그런 나에게 정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친구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이 2021년이니, 그 친구와는 약 21년정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재건이는 나와 비슷한 가정환경에 살고 있었기에 서로 통하는 게 많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재건이는 정말 외향적이고, 나는 내향적이었다. 주위사람들은 내가 내향적이었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데, 정말이다. 재건이가 얼마나 친화력이 있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냐면 동내에서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며 다녔다. 옆에서 나도 쭈뼛쭈뼛 인사를 따라했던 기억이 난다. 재건이는 옆에서 나에게 자신감 있게 인사하라고 나무랐다.
넉살도 좋은 친구이다. 중학교 때 비오는 날 같이 걷고 있었다. 꼬마 아이가 비를 피해 있자, 자신의 우산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고서는 나와 같이 우산을 쓰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많은 감명과 동기부여를 주는 친구임에 분명하다.
재건이는 나의 소심한 성격을 굉장히 싫어했다. 적당히 소심한 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주늑들어 있는 걸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당시에 유행이던 세이클럽과 네이트온을 밤 늦게까지 하며 대화를 나눴다. 우리의 가정상황에 대해, 미래에 대해, 현실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폭넓게 서스럼없이 말했다. 재건이는 나에게 항상 자신감 있게 살고, 어떻게든 삶은 살 수 있으니 대담하게 살자고 말하곤 했다. 지금에야 이 진리를 받아 들이고 깨달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안정된 삶과 계획되고 예측된 일만이 존재하길 바랐다. 반면 재건이는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살아갔다. 그의 호탕한 성격과 대범한 자세 때문인지, 지금도 재건이 곁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재건이가 나에게 몇 년간 세뇌에 가까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선생과 같은 태도 덕분에, 나는 필요 이상의 소심함과 남탓 하기 바쁜 비겁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의견을 피력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맞물려 정제되지 않은 불효의 삶을 약 3년간 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을 지원할 시기가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운이 좋아 성적은 공부를 안 한 거 치고는 잘 본 편이라 대전, 충남권 대학에는 갈 수 있었다. 정치외교, 경찰행정, 건축디자인 학과를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께 말했다.
“정치외교, 경찰행정, 건축디자인 학과를 지원할 계획이야.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정치외교 학과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하지 않고 그러라고 하셨다. 하지만 표정에서 대학은 보내야겠는데, 학비가 만만치 않아 근심이 있으신 게 분명했다. 처음으로 공부를 하지 않은 나에게 큰 죄책감이 부여됐다. 내 자유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온전히 어머니가 지게 되셨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년간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대화는 없었고, 서로의 감정다툼만 있던 우리의 관계였다. 그런 내가 진지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고, 가고 싶다 하니 어머니께서는 흔쾌히 그리고 무겁게 동의하셨다. 물론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 제도 덕분에 학비의 문제는 온전히 나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생활비도 방학 때마다 알바를 해서 충족했다. 매달 도움을 받았기에 온전한 경제적 독립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지원과 재건이가 바꾼 나의 성격으로 인해 나는 무난히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극히 축복된 삶에서 살았다. 남들은 부모님이 이거해라, 저거해라 도움과 조언을 넘어 간섭을 한다고 말한다. 심한 곳은 부모의 꼭두각시 즉, 부모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시켜 키운다고 한다. 불행하기 그지없다. 부모란 자식이 길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조력자 아닐까.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선택된 길만을 걷게 한다면 그만큼 자식을 파괴하는 행동도 없으리라 본다.
동내에서 축구를 하다가 축구를 중점으로 하는 중학교에서 스카웃이 있던 적이 있다. 집에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호되게 혼내시면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가지 못하게 되어 중학교 내내 내심 앙금이 있었지만, 축구를 전문적으로 못해서가 아니라 내 주위 친구들도 가는데 나는 가지 못해서 느꼈던 열등감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머니와 얘기해보니 경제적으로 도저히 여력이 안 되어 반대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검사, 의사가 됐으면 좋았던 거지, 이를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경제적 여력이 안 돼서 모든 걸 하게는 못하셨을 뿐이다. 무언가 되라고 직업을 정해주신 적은 없다. 다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명확히 지정해주신 한 가지 철학은 있다. ‘거짓말 하지마라’이다.
거짓말을 하면 그 누구보다도 엄하게 나를 벌하셨다. 가난하던 시절 집에 혼자 있는 내가 불쌍해, 사주셨던 당시 몇십만 원 하던 게임기가 있었다. 산 지 한 달도 안 됐다. 집에 왜 늦게 왔냐는 물음에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를 알아차리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 게임기를 박살 내셨다. 본인의 철학에 있어서는 언행일치를 보이시던 분이기에 나도 그 철학을 물려 받았다.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공기업에 들어가고 싶어요.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요. 대학에 들어가야 해요’라는 말들이 우리 청년들 입에서 나온다. 안정되고,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그리 한다고 한다.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사회가 그런 분위기여서는 분명히 고려해야할 상황이다. 그렇다고 속된 말로 그들이 우리를 대신에 살아가 줄 것도 아니다. 부모와 사회는 우리가 독립해 배우는 자세를 갖고 도전하게 하기 위해 도움을 줄 뿐이다. 나도 때로는 부모와 사회의 말에 거부하기에 힘들 때가 많다. 나도 그렇게 공무원 시험 물결에 휩쓸려 나 자신을 잃었었다. 물결에 빠져 나와 젖은 몸을 말리며 물결을 다시 보았다. 물결 위에는 물결을 이용해 보드를 타고 있는 이, 배를 타고 물결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 간척하며 길을 만들어가는 이가 있었다.
예비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무엇을 시켜야지 말을 하고는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꿈이 정해진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소리가 아닌, 부모와 사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따라간다. 때로는 그들의 소리가 달콤하고 유혹적이기에 안정되고 보장된 삶과 같이 들린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달콤하고 유혹적인 소리는 우리를 병폐하고 파괴시키는 악(惡)의 소리일 수도 있다. 치열하고 첨예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고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