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을 모으며
언어는 생명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한 단어 속에도 수백 년을 건너온 삶의 결이 스며 있고,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체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한때는 눈부시게 쓰였으나 지금은 잊혀 가는 우리말을 다시 세상 위로 꺼내고 싶었다. 잊히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누군가 다시 그 말을 품고 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저 좋은 말을 모아 책으로 엮고 싶었다.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그리고 더 나아가 어른까지, 단계별로 읽을 수 있는 우리말 모음집을 만들고자 했다.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좋은 말들. 곱고 사려 깊은 아름다운 말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말을 찾아가며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단어에 대한 단순한 뜻풀이를 넘어, 삶의 현장과 만남의 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문학작품을 찾아 나섰다. 시와 에세이, 오래된 소설집 속에서 말들이 어떻게 뛰놀고, 어떻게 마음을 건드렸는지 살폈다.
이해인 시인은『꽃삽』에서 ‘설렘’을 이렇게 노래했다.
“첫눈 오는 아침의 설렘은 말로 다 못 한다.”
정호승 시인은『수선화에게』에서 ‘느루’를 이렇게 품었다.
“느루 걸어도 봄은 찾아온다.”
그 문장들 속에서 나는, 단어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감동을 맛보았다. 그런 즐거움도 잠시, 조심스러움이 몰려왔다. 문학작품 속 문장을 인용할 때, 과연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작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내려놓지 못하는 염려가 있다. 한 문장, 한 구절이 좋아 옮겨 적을 때마다 희열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마음은 이미 그 글을 품었지만, 옮기려 할 때는 망설이고 주춤거렸다.
문장에는 이미 누군가의 치열한 고민과 오랜 수고가 담겨 있다. 그러니 창작물을 가져올 때면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문장을 옮긴다 해도, 저자의 생각과 노력, 투자한 시간과 정신을 빌려오는 일임을 알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름다운 문장일수록, 저자의 숨결이 선명할수록, 법적 책임 이전에 ‘마음의 빚’을 먼저 느끼게 된다.
남의 글을 인용하는 순간마다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이유는, 순순히 저작권이라는 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내 마음이 자칫 도리와 예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근심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게 저작권법에서 어문 저작물 관련 조문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공정이용, 정당한 범위, 출처의 명시, 저작물 보호 기간, 일시적 복제 등 조항들은 명확하면서도 모호했다. '정당한 범위'는 몇 문장까지일까, '공정한 관행'은 어디까지 허용될까. 한두 문장이라면 괜찮을까. 세 문장이면? 다섯 문장이면?
책을 다 만들고 난 뒤에,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 작가명과 작품명을 반드시 밝힐 것.
• 인용은 짧게, 본문을 보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져다 쓸 것.
• 내 글과 인용문은 명확히 구분할 것.
•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글 전체에 담을 것.
그런 원칙 아래, 나는 하나둘 우리말을 품기 시작했다.
진정성을 잃지 않고, 법의 울타리 안에서 아름다운 우리말과 문학적 숨결을 함께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믿음으로.
그러다 ‘달보드레하다’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마치 먼 길을 걷다가 발견한 작은 샘물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그 말은 오랫동안 메마른 내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박완서 선생은 "그 아이의 미소는 참으로 달보드레했다."라고 썼다.
‘다소니’라는 말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다소니.
그토록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의 이름을 우리는 언제부터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까. 김연수 작가는 "그 밤 나는 다소니를 위해 모든 소원을 아낌없이 빌었다."라고 표현했다. 간절함과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묻어나는 문장.
나는 이런 단어를 만날 때마다, 마치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되찾은 듯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오래된 우리말을 하나하나 품어가던 어느 날, 내 삶에서도 작은 기쁨이 찾아왔다. 아들이 장가를 들고, 손녀가 태어난 것이다.
집안은 환희로 가득했지만, 곧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과제가 다가왔다. 가족들은 정성껏 지은 이름들을 보내왔다. 뜻도, 소리도, 예쁘고 고운 이름들. 그러나 내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아이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을 이름을 성급히 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며칠을 고민했다. 수시로 컴퓨터를 열어 한 글자, 또, 한 글자 적어가며 생각했다.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떠나 마주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는 생각 끝에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다온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누구나 망설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
나는 손녀에게 그런 이름을 주고 싶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이 아이는 다정하고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세찬 바람에도 등을 돌리지 않고, 온기를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다온"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나니, 내 마음속에도 작은 햇살 하나가 반짝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다온아, 다온아. 마치 내 마음도 다정해지는 듯했다.
말은 사람이다. 이름도, 단어도 결국은 사람을 닮아야 한다.
나는 지금 잊혀가는 말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단어 속에 깃든 시간과 온기를 되살리기 위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에게 다온 같은 이름을, 달보드레한 말 하나를 건네기 위해.
아직 늦지 않았다.
조금 더 서두르면, 우리는 서로에게 잊히지 않은 말을, 잊지 않은 마음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작품 속에서 건져 올린 단어 하나, 한 문장이라도, 누구보다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면, 저작권의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품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잇는 이 작은 일이,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숨 쉴 수 있을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