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회사에서 상사에게서 “이제 뭐, 퇴직까지 얼마 안 남았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지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퇴직 이후의 시간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마침 그즈음에 먼저 회사를 그만둔 두 분 선배를 따로 만날 일이 있었다. 같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분들이라, 두 사람의 지금 모습은 언젠가 내가 마주할 수 있는 미래의 두 장면처럼 보였다.
첫 번째 선배는 퇴직과 동시에 회사 다니며 지켜온 생활 리듬을 거의 다 내려놓은 분이었다.
“이제 알람 맞출 일도 없고, 아침 회의도 없는데 뭐 하러 일찍 일어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까지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퇴직하고 첫 한 달은 늦잠을 실컷 자고, 보고 싶던 드라마와 영화를 마음껏 보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두세 달이 지나자, 하루와 하루가 붙어서 하나의 긴 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침과 점심의 경계가 흐려지고, 주말과 평일의 차이가 희미해진 뒤부터는 “오늘 하루 뭘 했더라” 하고 떠올려 봐도 딱히 기억나는 장면이 없는 날이 늘어갔다고 한다. 회사에 안 나가도 된다는 건 여전히 좋은데, 가끔은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선배의 어깨선이 오래 남았다. 퇴직이 자유가 아니라, 빈 시간과 마주 서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또렷해졌다.
몇 달 뒤에 만난 다른 선배는 정반대였다. 이 선배는 퇴직 후에도 회사 다니던 시절과 비슷한 생활 리듬을 일부러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7시쯤 일어나. 예전처럼 출근을 하지는 않아도,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건 계속하고 있어.”
아침에는 간단히 운동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책상 앞에 앉는다고 했다. 오전에는 공부나 독서를 하고, 오후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나가고, 가끔은 단기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한다고 했다.
“회사 다닐 때처럼 9시부터 6시까지는, 나한테 맡겨진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대신 그 일이 꼭 회사 일이 아니어도 되는 거지.”
이 선배에게서 느껴지는 건 바쁨보다는 리듬에 가까웠다. 주말과 평일을 예전만큼 뚜렷하게 나누지는 않지만, 하루마다 나름의 구조가 있는 탓인지 표정이 단정해 보였다. 두 사람을 차례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퇴직인데도 왜 이렇게 다른 풍경이 되는지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었다. 한 분은 알람을 끄는 순간 일상의 뼈대까지 함께 무너져 내렸고, 다른 한 분은 직장생활 때 몸에 밴 루틴을 퇴직 이후의 삶 위에 천천히 옮겨 놓고 있었다.
그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꼭 돈이나 직함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언제 일어나고, 어느 시간에 무엇을 하고, 어떤 리듬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가’ 같은 사소한 것들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계획보다, 하루의 기본 구조를 어떻게 가져갈지 결정하는 쪽이 퇴직 이후의 삶에 더 현실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아직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아침 알람을 맞추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리되지 않은 메일함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 일상이 버겁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두 선배를 만나고 나니 이 루틴이 언젠가 내 퇴직 이후를 지탱해 줄 최소한의 기초공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루틴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밴 생활 리듬이라는 점에서 더 그럴 것이다.
퇴직 후에는 마음 편히 늦잠이나 자고 싶다고 말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말 뒤에는 “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욕구도 분명 섞여 있었다. 그런데 두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근무 시간을 새로 짜야하는 시간이겠구나. 아무 요일도 아닌 날들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평일과 휴일의 리듬을 다시 정해야 하는 시기겠구나.
나는 아직 퇴직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퇴직 후의 삶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퇴직은 회사를 떠나는 사건인 동시에, 오랫동안 몸에 밴 루틴과 마인드를 어디까지 가져갈지 스스로 정하는 순간이라는 것. 회사가 사라지더라도, 그동안 회사와 함께 쌓아 올린 나만의 구조까지 같이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회사를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첫 번째 선배처럼 모든 루틴을 단번에 끊어 버리는 방식보다는, 두 번째 선배처럼 내게 맞는 새로운 9 to 6을 다시 짜보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그 생각을 미리 해두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덜해진다. 그래서 요즘은 “퇴직 후에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보다 “퇴직 후에도 어떤 리듬만큼은 지켜갈까”라는 질문을 조금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아직은 퇴직 전이지만, 그 질문을 미리 꺼내 보는 일.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퇴직 준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