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게 세상의 전부인 사람들

낯선 말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누군가 낯선 단어를 쓰면 잘난 척한다고 한다.

전문가가 아니면 말할 자격이 없다는 듯 굴기도 한다.

정작 직접 따지진 않는다.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린다.

비난은 대체로 그렇게 이뤄진다.

조용하고, 집단적이고, 나름 용감하다.


이 현상을 단순히 속 좁은 사람의 문제로 치부하면 너무 쉽다.

심리학은 여기에 이름을 붙였다.


코넬대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당시 대학원생이던 저스틴 크루거는 1999년 코넬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논리력, 문법, 유머 감각 등을 실험했다. 결과는 단순했다. 하위 25%에 해당하는 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평균 이상이라고 과대평가했고, 반대로 상위 25%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핵심은 이것이다. 어떤 분야를 제대로 평가하는 능력 자체가, 그 분야에 어느 정도 정통할 때 생긴다. 잘 모르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공자가 논어 위정 편에서 이미 말했다. 무려 2,500년 전에 말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_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편한 역설이 하나 있다. 실력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자신감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영역이 눈에 들어오고, 보일수록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대로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침없다. 잘 모르면서 더 강하게 주장하고, 자기 생각에 맞는 정보만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을 경시한다. 조롱이 집단적인 이유도 여기 있다. 혼자서는 불안하다. 자기들끼리 모여야 확신이 생긴다.


버트런드 러셀은 1933년 나치즘의 부상을 경고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The fundamental cause of the trouble is that in the modern world the stupid are cocksure, while the intelligent are full of doubt." _ "현대 세계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둔한 자들은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고 지적인 자들은 의심으로 가득하다는 데 있다."


나치즘을 논하던 문장이 SNS 시대에도 그대로 맞는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사실보다 강한 영향력을 갖는 구조는 그때도, 지금도 다르지 않다.


더닝 자신도 이 점을 강조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 오판은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편향은 학력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은 명문대 출신들에게서도 같은 패턴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쌓은 전문성을, 전혀 다른 분야로 쉽게 확장해 버리는 경향이 그것이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누군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말이 처음부터 내 언어로 쓰인 게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거나, 무슨 뜻인지 스스로 찾아보면 그만이다. 이해의 범위가 좁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비난하는 사람은 대개 뭔가를 지키려는 것이다.

자신의 기준이,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세계가 흔들릴까 봐.

낯선 말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걸 조롱으로 처리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좁은 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찰스 다윈은 1871년 『인간의 유래』에 이 말을 남겼다.


"Ignorance more frequently begets confidence than does knowledge."_ "무지는 지식보다 더 자주 확신을 낳는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말은 너무 많이 반복되어 이제 뻔하게 들린다. 그런데 앎의 영역에서 겸손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다. 잘못된 확신 없이 생각하는 능력. 모른다는 걸 아는 능력. 거기서부터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농사 이야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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