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전자레인지 버리고… 19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려
황민호의 ‘나로부터 생활혁명’⑤
먹는 것 참으로 중요하다. 과도한 육식에서 채식으로 전환한 후 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나물과 채소라 봐야 상추, 오이, 가지, 미나리 정도 밖에 알지 못했던 무식쟁이가 나물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취나물, 뽕잎, 고춧잎, 돌미나리, 돌나물, 비름나물, 메밀나물, 질경이, 먹고사리, 쇠뜨기 등의 나물을 알게 됐다. 불과 5개월 전만해도 나물과 채소 반찬은 냉장고에서 먹지 않고 오래 두다보니 상해서 버리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지금은 나물에 심취했을 정도로 정말 맛이 있다.
나중에 나물 연구소라도 차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장아찌 종류를 먹다보니 주위에서 지적도 나온다. 너무 짜게 먹는 것 아니냐? 그리고 먹는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너무 빨이 먹는 것 아니냐? 고 맞는 지적이다. 나의 먹을거리는 완성이 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내 먹는 방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고맙다. 그리고 나는 생활운동의 단계에 이미 들어갔다.
따로 시간내지 않아도 일상 생활속에서 운동을 한다. 새벽의 등산은 어제 하루를 성찰하고 오늘 하루를 계획하는 시간, 그리고 이동하는 것을 되도록 다양화하며 움직임을 늘였다. 걷기, 뛰기, 자전거, 버스, 카풀, 자가운전 등 얼마나 다양한가? 늘 그 때 그 때 내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이러면서 생활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대한 성찰이 시작된 것이다.
먹을거리 혁명은 생활운동을 거쳐 나로부터의 생활혁명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이야기다.
▲ 생활운동으로 자전거를 타다. 보통 자전거를 레저용으로 많이 타는데 나는 생활 자전거 타기를 권장한다. 사진은 레저용으로 옥천 향수100리를 순례하는 자전거 동호인들.
몸의 건강과 운동의 문제는 늘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 과연 그럴까? 이 화두는 지금도 나를 성찰하게 한다. 앞서 밝혔듯이 몸의 건강과 운동은 반드시 지역사회와 연동이 될 수 밖에 없다. 지역사회와 연동된다는 것은 이 지구별의 모든 것과 맞물려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먹을거리 혁명의 과정에서 나는 로컬푸드를 재발견했다.
내 소박하고 건강한 밥상에는 매주 꾸러미로 배달되는 옥천살림의 향수 꾸러미와 안남 배바우밥상 꾸러미가 번갈아 오른다. 이 꾸러미들은 너무도 건강해서 유통되는 과정도 정직하다. 옥천살림은 얼굴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와 직거래를 위해 유통마진을 10%밖에 떼지 않으며 장바구니를 직접 들고오는 소비자에게는 지역화폐 1000살림을 주며 환경과 자연을 생각한다.
▲ 매주 배달되는 지역농산물 꾸러미는 매일 내 식탁을 건강하고 소박한 밥상으로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다시한번 지역의 이웃농부들에 감사.
또 나는 이 꾸러미를 통해 정말 제철에 나는 농산물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먹으면서 배우고 있다. 우리 지역에 이런 것이 나고 이 시기에 이런 농산물이 생산되는 구나하고 밥상머리에서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정성과 땀방울이 담긴 편지를 보면 참 정감있고 고맙다.
로컬푸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의 대농, 규모화, 브랜드화, 대량생산 등의 정책에서 소농, 다품종 소량생산, 친환경, 다양성 존중, 생태계와의 교감, 에너지에 대한 고민 등으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매 장날마다 보따리에다 농산물 바리바리 싸들고 물 흐른다고 버스기사한테 구박받으면서도 내다 파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소박한 정성이 담긴 농산물을 집안까지 받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참 좋다고 할 수 밖에.
▲ 요즘은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활속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하고 있다. 사진은 대전 문화잡지 월간토마토의 한 좌담회에 참석한 모습.
생활운동의 변화
운동은 헬스클럽에 갇힌 운동이 아니라 옥천이라는 너른 지역마당에서 자유자재로 변형하며 신나게 운동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맘껏 누비며 여기서 누빈다는 의미는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자전거 타고 다니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때로는 맨발로 걷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난다.
악수하고 인사하고. 서로에게 건강한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나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열차를 탈 때도 가장 느린 무궁화호를 선호하고 열차와 지하철, 버스, 자전거, 도보의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이렇게 누비니 공동체 망이 형성되고 나는 그 안에서 참 따뜻하고 좋다. 사람들의 따뜻한 피가 내 몸속으로 흘러 순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뮤니티의 재발견인 셈이다.
▲ 이제 종이 낭비를 줄이기 위해 책을 사기보다는 도서관을 많이 이용한다. 사진은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에서 한 컷 찍어봤다. 소유보다는 공유다.
진정한 생활혁명의 시작
이렇게 먹을거리와 운동에서 혁명이 끝났더라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나로부터 생활혁명은 조금은 다르지만 그저 그런 혁명으로 머물렀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먹을거리와 생활운동에서 탄력을 받은 나의 혁명은 전방위적으로 내 생활 안으로 파고들었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단 자본에 대한 성찰이 그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것 과연 올바른 것일까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자본의 성찰은 내 스스로 자본의 촉수라고 생각되는 전기 사용부터 시작됐다.
우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걷기를 시작했고 처갓집에 갈 때에는 늘 19층까지 걸어 오른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플러그 있는 물품들을 하나둘씩 없애기 시작했다. 청소도 잘 하지 않는 정수기를 없앴고 각종 전자파로 몸에 해롭다는 전자레인지를 과감히 버렸다.
전기 칫솔 보관대도 버리고 일반 칫솔 보관대로 교체했고 비데 대신 일반 변기로 바꿨다. 한 지인이 비데는 치질이 안 걸리는데 도움을 준다 하여 나중에 전기를 쓰지 않는 친환경 비데로 구입할 계획이다. 전기 먹는 하마였던 큼지막한 거실 TV를 없앴고 드라이기를 없앴고, 면도기를 없앴다.
그리고 앞으로 에어컨과 김치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까지 도전할 계획이지만, 이는 물론 가족안의 구성원과 민주주의 방식으로 충분한 토의를 거친 후에 결정할 요량이다. 또 먼지가 잔뜩 낀다는 커튼을 대부분 벗겨냈다. 진드기가 많이 산다는 침대 매트릭스도 나중에 없앨 계획이다.
모든 것을 성찰한다
그리고 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비누와 치약, 샴푸, 화장품에 대해 생각했다. 각종 이름도 알 수 없는 화학제품과 연마제, 계면활성제가 잔뜩 들어간 이들 제품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군살빼기 초기에는 치약도 안 묻히고 칫솔질만 하고 물 세안만 하며 샴푸와 비누도 아예 쓰지 않았다. 화장품도 바르지 않고 말이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지적질 하는 분들이 많았다. 얼굴이 그게 뭐냐느니, 이래서 사회생활 하겠느냐부터 그런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나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씩 사용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내 친동생이 천연비누, 치약, 샴푸 등을 만드는 재간이 있었다. 동생이 만들어 준 치약과 비누, 샴푸를 쓰는데 느낌이 괜찮다. 그동안 나는 비누나 치약이나 샴푸나 화장품이 어떤 성분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막 썼던 것이다. 이제 꼼꼼히 살펴본다.
성분에 대해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책을 사서 알아보기도 한다. 꼭 제품의 뒷면의 성분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묻는다. 어느새 꼼꼼쟁이 민호씨가 된 셈이다. 그렇게 난 생활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활 공부에는 화학과 물리, 생물, 국어, 영어, 자연, 도덕 등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민주주의의 시작
이 기고의 머리말이 몸 안의 민주주의이다. 먹을거리 혁명과 생활운동을 통해 피가 원활하게 순환할 수 있도록 내 몸 안의 민주주의를 구축했다면 이제 내 몸 밖의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혈관에 노폐물이 잔뜩 끼어 장기간의 소통을 막아왔던 것들은 이제 어느 정도 제거되었고 뇌와 심장, 간장, 폐 등 다양한 장기가 서로 소통하고 호홉하며 나름 민주적인 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부를 다졌으니 바깥이었다.
자본의 촉수인 전기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고 근본적으로 내 생활을 유지하는 자본에 대해 생각했다. 돈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인가? 내 한 달 동안 최소한의 생활비는 얼마일까? 필요 없는 돈은 과감히 절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옛날 직장 생활하는 동안에는 월급이 통장을 잠시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매달 들어가는 고정비용에 대한 성찰없이 그냥 몸을 내 준 것이다.
TV를 끊었다. 이제 책 구입을 자제하고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기 시작했다. 통신료를 절감했다. 보험을 줄였다. 걸어 다니면서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버스 타면서 기름 값을 상당부분 줄였다. 신용카드를 상당부분 해지했다. 언제 가입했는지도 모를 신용카드들이 즐비했지만 싹 정리했다. 전기와 기름, 재벌 기업들의 각종 상품에서 해방되지 자본에서 자유로워지고 자본에서 자유로워지니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 같았다.
국가의 녹을 받는 실업급여가 끝나더라도 이런 삶을 유지하려면 생활다이어트, 즉 내 몸 밖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원치 않는 꽉 짜여진 자본주의 매트릭스에서 나는 이미 길들여져 있었고 중독되어 있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몸과 마음을 갉아먹으며 이동해왔던 것이다. 일단 멈추고 성찰했다. 그러니 답이 보였다. 소유하지 말고 공유하려 하고 있다. 혼자 하지 말고 같이하는 협동을 통해 가치있는 연대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내 몸안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동력을 얻어 몸 밖으로 서서히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난 내 일상에 감동하고 감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