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인가? 남아있는 것인가? 지역에 산다는 의미
떠나게 하는 교육, 내보내는 지역을 성찰하다
농촌, 인구늘이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구, 사람을 숫자로 본다. 숫자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늘여보려는 노력은 참 가상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절대적인 수치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인구를 늘여보겠다는 그 몸부림은 기실 뭐라도 해야겠기에 '쇼'에 그치는 수가 많다.
안팎에서 지역소멸이라는 프레임으로 여기저기 압박을 해대니 지도에 빨간 것으로 표시하고 몇 년이면 소멸될 지역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니 사는 사람은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숫자에 매몰되면 사실 답이 없다. 5만명이 무너졌니, 3만명이 무너졌니 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역이 금방 소멸이라도 된 단 말인가. 과한 호들갑으로 여기저기 회자되기 시작하면 마치 곧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지는 집단 망상의 경험을 선사하려고 애들 쓴다.
인구의 구조를 봐야 한다. 군단위 안에서도 지역별 균형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세대별 균형이 잘 이뤄지고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고민 1도 없이 그냥 무조건 늘여야 한다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인구의 구조가 얼마나 병약한지 볼 수 있다. 옥천만 놓고 봐도 9개 읍면이 있는 지역인데 군 전체 5만명 남짓 인구 중에 읍에 거주하는 인구가 무려 3만에 가깝다.
한곳에 집중이 심하다는 것은 다른 변방 주변지역의 열악함을 반증한다. 고르게 균형 잡힌 곳으로 만들지 않고서 인구늘이기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이들은 나름의 출사표로 예전에 옥천읍과 인근 면 몇개를 묶어 옥천시로 만들자는 이야기도 했었다. 면 지역들은 아예 버리겠다는 처사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솔깃하게 먹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세대별 균형이다. 고령화비율이 30%를 넘나드는 농촌은 노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마저 왜 떠나는 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고 그냥 '농촌이니까'라고 내면화 시켜버린다. 농촌은 노인들이 사는 곳, 이렇게 기형적으로 뒤틀려 버린 인구구조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모든 세대들이 균형있게 살아야 끌어주고 당겨주며 성장할 수 있다.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고착화 된 인구구조에서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마치 농촌의 '종특'으로 굳어져 있고 당연한 것처럼 회자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다. 그런 것의 아무런 개선없이 인구늘이기를 한다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농촌의 가장 기본인 면단위 부터 무너지고 있다
면은 농촌의 가장 기본단위이다. 옛날 오일장이 열렸고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자치와 자급의 거점이 이뤄진 곳이 바로 면이다. 한 면에 초등학교가 많게는 5개까지 있는데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폐교되어 1면 1교만 어렵게 유지되고 있다. 면 소재지는 읍과 가까울 수록 약화되고 모든 서비스 기능이 읍으로 통합되는 모양새다. 그나마 면의 구심을 갖고 버티는 것은 면사무소, 보건지소 등 행정기구와 초등학교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기타 공공서비스기관과 시장 상점이 사라지는 것과 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폐교는 지역별, 세대별 균형을 확 깨뜨리며 지역 소멸의 정점을 찍는 행위이다. 지역에 더 이상 미래가 없고, 지속가능성이 불가하다는 낙인이다. 학교마저 사라지면 지역은 소거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지금 농촌은 이 절체절명의 시기이다.
안팎으로 포박당하는 농촌 교육
농촌교육은 안팎으로 포박당하고 있다. 교육이 자체 사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한 지자체와 일선 시군교육지원청 중심이 아니라 도교육청 중심으로 이뤄지는 교육사무는 시군단위 교육의 사각지대를 만든다. 학생 수 줄어드는 농촌학교를 폐교시켜야 도시 재개발 신도시의 학교를 설립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려고 사실 부추긴다. 학교 통폐합을 장려하며 각종 지원금과 통학버스 또는 기숙사형 학교를 만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해 혹 하게 만든다.
농촌의 교육문화 공간인프라와 서비스 인프라는 열악하기 그지 없으며 농촌 학교에서도 농업, 농촌, 지역을 잘 모르는 도시, 서울, 글로벌 중심의 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학생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통폐합의 압박은 거세다. 사면 초가 형국이다. 기대고 비빌마한 언덕 자체가 없다. 학생 수는 줄고, 통합해야 그나마 유지할 수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은 선택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하는 순간, 그나마 지역과 끈이 있었던 학교는 지역과 유리되고 더한 섬이 된다. 지역성이 거세되고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있어도 있는게 아닌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통 중학교의 경우 3개 면에 있는 중학교를 학생수가 그나마 많은 한개 면의 학교로 몰고 통폐합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숙사를 더 짓고 돈을 많이 투자하여 대외적으로 홍보를 통해 학생수를 모집한다. 그러면 제법 온다. 교육과정과 시설 등 보이는 것들이 유혹을 하기 때문에 더구나 기숙형 학교라니 굳이 이사를 가지 않고 청소년만 보내기 때문에 더 쉬운 선택지일 수 있다. 그렇게 학교는 하나의 교육서비스 기관으로만 활용되고 이용된다. 지역에 있다는 의미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는 특목고, 자사고 등의 학교 뿐만 아니라 대안학교도 거의 마찬가지다. 지역 연계 교육이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지역의 자원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수평적인 교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굳이 올일이 없다. 지역에 대한 추억도 관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촌학교의 현실은 어떻게든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열악한 농촌의 공간, 서비스 인프라
#1.읍내 한 아파트 관리동 복도, 두칸 정도 뜨는 와이파이의 데이터를 수혈받으려고 안간힘으로 벽에 밀착하여 걸터 앉는다. 여러명의 청소년들이 그렇게 남는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동네에서 딱히 갈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참 뛰어 놀다가 잠시잠깐 그늘에서 땀도 식힐겸 스마트폰 게임도 맘 놓고 하려면 와이파이 있는 공간을 탐색하게 되고 지하수의 맥을 짚듯이 그렇게 찾아낸 와이파이는 청소년들의 단골 공간이 된다. 대충 비만 피하고 앉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데이터 빈곤층인 청소년들에겐 그만한 적지가 없다. 경로당과 마을회관은 도처에 있지만, 그곳은 나이든 어른들만 가는 곳이고, 청소년들이 마실가듯 자연스레 찾아갈 곳은 손에 꼽는다. 그나마도 돈이 있어야 하는 카페나 피씨방, 코인노래방, 방방, 롤러장 외에 갈만한 곳이 딱히 없다. 도서관은 숨죽여 조용히 있어야 하고 책이라도 펴야 하는 강박에 시달려서 기피하고, 청소년수련관은 가보지 않은 친구들은 익숙치 못하다. 프로그램 하나라도 참여해 지도자와 안면을 트고 공간이 익숙해져야 그나마 한발자국을 들여놓는데 나름의 정서적 문턱이 있는 셈이다.
#2.고등학교 정도 진학하면 대부분 읍으로 나온다. 면에 있는 고등학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을 때 고민거리도 그만큼 커진다. 사실 그럴 때는 친구가 큰 복지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버팀목이 생기는 것과 같다. 머리가 커질수록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하고 동년배 친구와 연대의식을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밤을 세워도 끝이 없는 그 이야기들은 기실 지친 삶의 윤활유다. 이래저래 불투명한 진로,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가족간의 문제, 선생님과의 불화, 친구간의 관계, 애정전선 등 이래저래 고민은 한움큼씩 쌓여가고 빨리 꿈을 정하라는 직업과 전공을 정해야 한다는 압박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그래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방구이기도 하다. 학교 끝나고 같이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크지만, 버스 시간이 그것을 가차없이 끊어버린다. 면에 사는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버스 막차 시간에 무지막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통금시간이야 대화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다지만, 버스 막차는 어쩔 수 없는 통금시간을 정하게 만든다. 그것도 6시 길어봐야 7시, 빠듯하게 가야만 하는 막차시간 때문에 겉잡을 수 없이 달려야 하고 놓치면 큰일이다. 어렵게 모은 용돈으로 택시를 잡던지 정말 어렵게 전화를 해서 부모님한테 부탁을 해야하는데 사실 이 둘다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던지 잔소리를 옴팡 뒤집어쓰던지 둘 중 하나는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렇게 정서적 결핍이 생긴다.
#3.버스시간은 면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달달 외우고 다녀야 할만큼 중요하다. 그래야 시간을 나름 풍족하게 쓸 수 있다. 버스 하나 놓치면 한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양반이고 1시간30분, 족히 두시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탈 때도 있다. 한번 놓치면 차라리 걸어간다. 십리길은 사실 가뿐하다. 옛날 시골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이십리, 삼십리도 그냥 하염없이 걷는다. 버스를 놓치면 막상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퇴근 길 눈 오는 깜깜한 밤에 교복을 입고 걸어가는 청소년을 본 적이 있다. 왜 걸어가니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라. '버스를 타고 가는데 잠깐 졸았어요. 그랬더니 정거장 몇 개를 지나쳤고 그래서 내려 걸어가고 있어요.' '택시를 부르거나 부모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이 시간에 이 지역에서 택시는 없구요. 우리 집에 저기 마을 꼭대기거든요. 차는 없고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모시는데 눈 오는 길이라 괜히 오토바이 타고 데리러 오다가 미끄러질까 봐 전화를 안 했어요' 뭐 그렇다. 이동권에 대한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적이다보니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다. 면 지역 청소년들에게 물어봤더니 제발 버스가 한 시간에 한대씩이라도 다니고 막차가 10시까지는 안 바래도 9시까지라도 있었음 좋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이런 것은 별 고려대상이 아니라서 사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시내버스가 적자니까 타는 사람 별로 없으니까 낭비라고 생각한다.
#4.그래도 읍내와 인접한 곳에 사는 친구들은 축복받은 청소년들이다. 걸어서 지척에 모든 편의시설과 공공시설이 있으니 정말 '개꿀'이다. 이것도 부모 잘 만나야 한다. 시가지와 인접할 수록 땅값과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함부로 읍내에 진입할 수 없다. 농사짓는 부모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면에 살면 면 소재지가 생활권인데 면 소재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2천명 미만 인구의 면 단위에는 정말 식당 한 두개, 농협,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정도가 있는게 다인 경우가 많다. 그럼 학교 끝나면 갈만한 곳이 없다. 아까 말했듯이 친구가 가장 큰 복지인데 학교 끝나면 버스시간과 스쿨버스로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하니 이야기 할 시간도 공간도 마땅찮다. 시골 마을은 마을마다 뚝뚝 떨어져 있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몇 명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혼자인 경우는 그 외로움을 온전히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 한번 놀러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인도도 없어서 위험한 경우가 태반이라 쉽게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든 지하철 타고, 버스타고, 공용 자전거 타고, 공용 킥보드 타고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란 말이다. 원치 않는 고립이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이를 벗어나려면 도시로 이사를 가는 것과 얼른 독립하여 자가용을 사는 것 말고는 없다. 기실 어린 주민들은 이처럼 이동권의 제한을 강력하게 받는다.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학교 끝나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으면 작은도서관이나 청소년 문화공간 같은 곳 말이다.
농촌을 바라보는 시선, 지역을 배반하는 교육
#1.'공부 못하면 너 여기 남아서 농사지을 거야' 몇 년 전 어떤 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서 몹시 속상하다고 한 학생이 말을 했다. 아버지가 농사 짓는 것을 보면 정말 머리가 좋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해 정말 기분이 안 좋다는 투로 말을 했다. 사실 옥천만 해도 공무원의 30% 이상이 대전에서 출퇴근하고 경찰공무원 50%이상이 대전에서 출퇴근하며 교육공무원 70%이상이 대전에서 출퇴근을 한다. 도시에서 사는 교사들이 자연스럽게 농촌에 산다는 것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존중하는 태도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막돼먹은 말을 하는 교사가 없겠지만, 여전히 수업시간에 도시 편향적이고 글로벌 편향적인 말을 은연중에 하는 것은 뭐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로 서울로 세계로를 입밖에 자연스럽게 내고 그런 꿈을 가진 청소년들을 칭찬해준다. 비단 학교 뿐일까. 비단 교육 뿐일까. 수많은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는 전방위적으로 도시 중심 서울중심, 미국, 유럽 중심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그리고 가야 한다고 말을 한다. 사실 청소년들은 교육과 미디어 수많은 관계 안에 포박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는 교육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이다. 지역과 농촌과 농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이에 대해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교가 전혀 지역의 영속성과 농촌, 농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폄훼하는 교육을 은연중에 하고 있으니 말이다.
#2.크면 클수록 청소년들이 지역에 남는 꼴을 잘 못본다. 이상하게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당연히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쯤 되면 청소년들이 지역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내보내지는 것이다. 지역에 남으면 실패자가 되고 루저가 되는 어떤 인식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 가령 이런 말들이다. "걔는 학교 졸업하고 대학 안 갔어? 집에서 뭐한대? 대학 가서 공부 안 할거면 취업이라도 해야 할텐데.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 아녀? 참 큰일이다." '요즘 집에서 뭐하니? 어떻게 학교는 잘 간겨? 취업은 한 겨. 응 그렇구나' 나름 관심 가져준다고 하는 말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길 가다가 아는 어른 만나기가 무서운게 그 때문이다. 한 친구가 있었다. 상고를 나와 대기업 반도체 공장 생산직에 취업하여 잘 됐다고 학교 정문 펼침막에 이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왠 걸 막상 가보니 이교대로 정말 기계처럼 일을 했다고 했다. 6개월 넘는 인턴이라 눈칫밥을 한참 먹어야 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쓸 틈이 없으니 돈은 모였으나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더니 이리저리서 듣는 차가운 말들. "걔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뒀대. 배가 불렀네. 어디서 그런 월급을 지가 받어.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건데. 아이고." "그래 그거 그만두고 뭐한대? 그것도 못하고 그만두면 어디가서 밥 빌어먹고 살겄어" 이런 말들은 사실 비수처럼 꽂힌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공동체의 관계성은 때로는 자유롭게 날개를 단 익명을 잡아먹는 감옥이 되고 지옥이 된다. 지역에는 움직이는 씨씨티비가 있고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데 낮말도 밤말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전해진다. 사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어디가서 누굴 만나는 것도 다 부모님 귓속으로 다 들어오니 말이다.
그렇게 탈출이 시작된다
그래서 학생 수가 줄어든다. 이사가자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고 가족 안에서 청소년들 목소리가 지분을 얻고 그만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이사를 본격적으로 계획하는 집이 늘어난다. 교육에 신경을 쓰는 집일 수록 더욱 그렇다. 학생 수가 줄어들고 폐교위기 이야기가 솔솔 나올 수록 일찌감치 탈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학교에 보내야지 경쟁을 해서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떤 믿음에 가깝고 종교에 근접하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일수록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갈 수록 도시 유학을 보내는 것과 통째로 이사를 가는 것과 관련하여 더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그냥 당연한 귀결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생 수가 줄어든다. 전교생이 20명 내외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폐교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교육청에서 은근히 작업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분교로 결정되면 폐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복식학급이 되는 순간 학업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인구가 적은 농촌이라도 1면 1교의 초등학교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곧 무너질 성 싶다. 이런 추세와 별달리 이를 바꿔낼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이는 매우 복합적이다. 지자체는 교육 관련 교육청 소관이라고 관여를 하지 않으려는 기본 속성이 있고 시군 교육장은 선출직도 아닐 뿐더러 도교육청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일선 학교를 유지시키려는 의지나 생각도 별로 없다. 시스템 상 그렇다. 교육 사무가 아예 없는 지자체와 광역 중심으로 굴러가는 교육체계가 사실 이런 비극을 잉태하는 법이다. 작은 학교, 농촌 학교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실천의지를 갖고 있는 교육감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냥 이렇게 굴러가는 것이다. 폐교 위기의 작은 학교에 대한 뉴스가 어디선가 나올 것이고 안타깝지만 마지막 졸업식을 하게 됐다는 것이 또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학교 통폐합의 유혹과 그 끝
'학교 통폐합하면 더 좋은 학교 만들겁니다. 기숙형 통합학교를 만들어 타 지역에서도 많이 올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출 겁니다'
이런 말들은 유혹하는 단물에 불과하다. 그런 단물에 취했다가는 쪽박차기 십상이다. 통폐합한 학교는 대부분 지역성을 상실하고 기숙학교로 장소만 지역에 있을 뿐 지역의 학교로 기능하지 못한다. 시골의 자연환경과 경쟁력있는 학습을 하는 그런 학교로 부각되며 나름 대안 교육을 희망하는 도시 중산층 부모의 눈에 띄어 보내지고 거쳐가는 학교가 된다. 그 학교가 유명해지면 유명해질 수록 지역에 있는 학생들이 오히려 가지 못하고 밀려난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학교를 성적 때문에 가지 못하는 이 서글픔이란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학부모회장과 학생회 간부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다 점하게 되어버리면 사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허망하게 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기숙학교의 특성상 부모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청소년을 보낼 뿐 이사를 직접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학교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외화된다. 지역과 더 유리되어 지역에 있지만 지역과 점점 무관한 학교가 되는 것이다.
대안 교육을 표방하는 운동적 성격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어느 지역은 작은학교 살리기 ‘어벤져스 교사들’을 꾸려 그 학교에 다 내신을 내고 확 바꾸는 프로젝트를 하는 지역도 있다. 미리 이 학교에 가서 이렇게 학교를 싹 바꾸겠다고 하며 학부모들에게 홍보하면 반신반의하면서도 학생 수가 모아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시도의 첫 마음이야 애틋하고 복지부동하는 교육공무원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교육효과를 내면서 분명한 성과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똑같이 학교의 지역성을 상실하고 대안교육 쇼핑하듯 상품을 골라 소비하는 것 그 이상으로 진척되지 못한다. 지역은 대상회되고 그 학교가 유명해질 수록 오히려 지역 아이들은 가기 힘들거나 밀려 있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지 않는다. 이용만 할 뿐 정주하거나 뿌리내리지 않는다. 물론 지역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 학교가 지역에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그만큼 지역에 와서 소비하는 층들이 늘어나고 지역이 알려진다는 측면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지만,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는 정말 생각해볼 문제라는 것이다.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최근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교육이주주택 이런 용어를 만들어내며 정책으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내용을 뜯어보면 집을 지어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도시민이 오면 월 10만원 내외로 정말 저렴하게 임대하는 것이 큰 골자이다. 뭐 이렇게 애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움직거리지 않는 지자체에서 이런 것도 한다니 좋게 봐 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거기서 끝나버린다. 일자리도 필요하고, 면 소재지에서도 도시에 비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문화, 교육 환경이 더불어 필요하다. 사람도 없고 돈도 안 돌다 보니 시장이 일찌감치 철수한 지역에 공공성으로 이 빈틈을 어떻게 채우려고 할 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이는 나랏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 따위 할 거면 아예 시작하지도 말고 괜한 흉내와 시늉만 낼 거면 하지 않는 게 낫다. 생활여건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에서 하는 걸 보면 말만 그럴싸한 농촌협약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뜯어보면 내내 열악한 면 지역 몇 개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하려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365 생활권 구축(30분 내 보건, 보육, 소매 등 기초생활서비스, 60분 내 문화, 교육, 의료 등 복합서비스 접근 보장, 5분 내 응급상황 대응시스템 구축) 등을 언급하며 말만 화려하다. 결국 공모사업으로 통합을 하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생활권이 다른 몇 개마을을 행정적으로 조정할 필요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면 생활권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도로가 뻥뻥 뚫려 교통과 통신이 예전과 달라졌으니 통폐합하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소리일랑 한번 살아보고 말씀하길 권해드린다. 거리가 가까워져도 오랫동안 전해지고 축적된 관계와 정서, 문화란 게 있는 것이다.
폐교되면 사실 이는 여느 기관의 폐점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어린 주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그 지역의 미래를 결국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과 다름없다. 정말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고 소거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워낙 바닥인 상황이니 여러 시도들과 성과들을 나름 챙겨주고 후하게 쳐주는 경향이 없지 않다. 농촌 작은 학교에서 이런 일도. 하면서 여러가지를 부각시키는 일 나름의 애정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접근이 잘못되면 지향을 잘못 잡으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교육문제는 사실 인구문제와 맞닿아있다. 인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구는 어떻게든 많이 늘리는 게 좋고, 교육은 서울대를 어떻게든 많이 보내는 게 좋다는 이상 사실 답은 없다.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 하나만 키우면 지역이 산다는 이런 안일한 발상을 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여전히 있다. 지역에 남은 청소년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식어버린 찬밥처럼 생각하고 서울 유명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에게 기숙사도 제공하고 장학금도 주며 별의 별 혜택을 주는 지자체가 여전히 많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하고 글로벌한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 교육 이념을 지배하는 이상 답이 없다는 거다. 대안교육 이야기하면서 농업, 농촌의 중요성, 기후위기 이런 것 등을 가르치면서도 지역을 거쳐가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다른 결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됐든 지역은 계속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할 것이다.
뿌리내리는 교육이 필요하다
뿌리내리는 교육,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이 사유하고 서울로 세계로 가지 않아도 자긍심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을 독점해 버린 학교를 너머 새로운 지역사회교육을 설계할 때가 되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신하며 비하하는 교육 따위일랑 이제는 철거해야 한다.
지역, 농촌에 남아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농업을 한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충분히 성찰하고 숙의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과정에 이를 담아내야 한다. 교육과정에 담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이를 어떻게 행할지 고민해야 한다.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너도 나도 여행 홀릭에 빠지고 관광에 목을 멜 때, ‘노마드’라는 말이 괜스레 멋있어 보일 때 뿌리내리며 정착하여 산다는 것은 참 답답하고 답이 없어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열패자가 되는 길이 아니며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를 스스로 만드는 소중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역에 사는 한 주민으로서 자치와 자급, 순환과 공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지역의 미래를 더불어 만드는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자치 코뮌으로 지속성이 담보될 때, 더이상 청소년들이 빠져나가지 않고 뿌리내리며 스며들고 번질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천개 만개의 지역학이 만개하여 영속가능한 다양성의 문화가 살아 숨쉬었으면 좋겠다.
겉잡을 수 없는 성장 중독과 발전 강박의 시대, 통합과 효율만이 강하고 커질 수 있는 길이라는 명제가 깊게 심어진 이 시대에 이미 쪼그라질대로 쪼그라든 농촌과 더 작기 어려워진 작은 학교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작은 학교의 낭만에도 취하지 말 것이며 시골의 풍광과 인심에만 매몰되지 말것이며 현실을 냉정하게 즉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