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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1. 2024

지역농촌 다원성 죽이는 ‘메가시티’ 열풍, 이면을 보자

들어가며


 예전의 나라면 응당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시골 군단위 지역이야 인근 광역시 중심으로 통합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자꾸 인구가 줄어드는데 뭐 뚜렷한 대책이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역이 소멸된다고 하잖아’ 학생 수가 줄어든 다는데 그래도 학교를 유지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핵도시니 메가시티니 이야기가 나올 때도 뭐 그렇게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서울 중심 일극이 너무 강하니까 다극 중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균형발전에 도움이 될 거야. 이런 나이브한 생각을 했었다. ‘광역 중심으로 교통망을 확충하여 코어를 더 강화시켜서 각 지역의 서울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나을 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나 했었다. 

 그 때는 대전광역시민이었고 정말 바로 인근 옥천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나에게는 농촌과 농업, 지역이란 감수성은 아마 1도 없었을 테니까. 서울에 대한 열등감과 컴플렉스로 인 서울 하거나 대전이 더 커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꼭 와서 살아봐라 하는 말에 때론 반발이 일곤 했다. 꼭 살아봐야 아나? 그냥 보고 듣고 배운 것만으로도 합리적 상식적 유추가 가능한데 어떤 열등감의 발로이거나 피해의식의 발현으로 넘겨짚곤 했다. 살아보고 나서 이야기 하는 말은 논리 싸움에서 지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고집피우며 하는 말이라고 한 수 아래로 접어보곤 했다. 

 옥천에 온 지 20년 다 되어간다. 중간에 신문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왠지 연고도 없는 옥천을 떠나기 싫었다. 익명에 가려진 끊어진 관계성이나 그들만의 리그로 점철된 도시 문화도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거니와 그냥 흙내 묻은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속의 관계망에 더 애착이 갔는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지역 소멸이란 말이 우습고 메가시티니 중핵도시니 하는 말들이 탁상공론, 또 다른 식민 구축에 맞는 이론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그것은 내가 변방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수성이다. 전적으로 옥천 중심, 지역 중심, 농촌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대상화, 장기말 놀이에 지나지 않는 속임수라는 것을 금방 간파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가끔 현혹되기도 한다. 옥천과 대전과의 광역전철이 연결되면 편의성과 편리함이 가져다주는 달콤함 때문에 옥천이 대전에 편입되면 군민이 아니라 광역시민이 된다는 어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지역에 사는 사람도 훅 그렇게 되길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신기루와 환상을 걷어내면 퍽퍽한 현실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 주권을 빼앗긴 국가가 그러하듯이 변방의 편입된 영토에 대해 누가 그렇게 관심을 갖겠는가 말이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할 터이고 온갖 혐오시설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변방에 설치하려고 할 것이다. 인구가 적다는 이유로 말이다. 

 읍에 살다가 면에 살아보니 또 틀리더라. 문화가 다르더라. 읍은 도시 문화로 변형되어가는 단계라면 면은 그야말로 관계성이 체계를 압도한다. 옥천 사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청산 사람, 안남 사람, 이원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끈끈한 관계성이 어떤 공통된 정서를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청산에 살 때는 나는 청산 사람이었다. 청산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살갑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처럼 머리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직접 살아보니 온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더라. 그래서 제발 살아보기를 권한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적 기호들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지식들을 한 순간에 걷어낼 수 있다. 살아봐야 알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가능하면 살아보고서 말한다면 더 많은 공감대 속에 이야기가 먹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유럽의 어느 나라나 일본에 비교하더라도 기초지자체 평균인구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기초지자체 평균인구가 1만명 이하인 곳이 엄청 많다. 우리는 5만이 무너지네, 3만명이 무너졌네 엄청난 호들갑을 떨면서 지역이 지도상에서 금방 사라질 것을 걱정하지만,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코뮌들이 다른 나라에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도시 사는 것 전혀 부럽지 않다. 서울에 살면 천만명 중의 하나이고 대전에 살면 150만명 중의 하나이지만, 옥천에 살면 5만명 중의 한명이다. 존재감이 확 살아난다. 안남면에 살면 천명 중의 한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처럼 보인다. 논과 밭이 보이고 길이 길처럼 보인다. 6차선, 8차선 도로가 없어서 도로가 갈라놓은 구역이 조금 더 쉽게 횡단된다. 4차선 도로도 조금씩 생기는 데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역과 지역을 단절해 놓는다. 

 지역은 매우 중요한 화두이다. 도식적인 민주주의를 일상의 민주주의로, 엉터리 체계정치를 생활정치로 전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사실상 가능한 곳이 바로 지역이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왜곡되거나 굴절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제어될 수 있는 곳이 지역이다.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언제든 살아 숨쉬고 물처럼 흘러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로 위장한 엘리티시즘에 불과하다. 자꾸 커지려고 하는 욕망, 뭔가 거느리고 싶은 욕구가 약자들의 연대를 망친다. 메가시티를 거부한다. 중핵도시를 반대한다. 작은 것들의 연대로 충분히 이를 커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연결되는 것이 반드시 진화라고 생각지 않는다. 삼한 시대 작은 나라의 연맹체 국가가 외려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앙집권, 국가의 꼴을 갖추면서 주민의 삶은 더 열악해졌다고 생각한다. 국가처럼 보지도 않을 것이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애국 애족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애향하고 애민할 것이다. 전시에 창과 칼을 버려야 했다면 이제 평시에는 돈과 힘을 버리고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 고향에서 조금 더 사람 사는 곳으로, 생명들이 어울렁 더울렁 사는 곳으로 만들기를 희망한다. 자급과 자치 그리고 연대의 힘으로 중심과 수직적인 위계가 아니라 중심없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것이다. 아니 꼬리도 머리도 없는 몸뚱이로 뜨겁게 만날 것이다.


 지방과 지역, 광역시도와 시군 어떻게 다를 것인가?


 지역의 비극은 국가가 중심을 서울에 두고, 하위구조인 지역을 지방으로 크게 뭉뚱그려 편입시켜 설정했기 때문이다. 

 서울-지방-지역의 위계 구조에서 지역은 서울과 지방의 틈바구니에서 목소리도 못 내고 잠식되어왔다. 여기서 편의상 지방이란 광역시나 광역 거점도시로 규정하고, 지역이란 그 외의 시군단위를 지칭한다. 지방은 서울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지역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서울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외 지역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과 유사하다. 

 지역은 이중착취를 당해왔다. 한번은 서울에 의해, 한번은 광역거점도시에 의해 이중 나선형 구조로 연일 착취되는 뫼비우스의 고리 안에 편입되어 있다. 인근 시군 즉 지역 중에 농촌은 인근 도시와의 통합을 강요당하는 삼중 착취 구조에 놓여있다. 

 사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패러다임은 지방과 지역을 한 묶음으로 묶이게 만드는 구호였지만, 이 구호와 운동의 단물은 사실상 지방(광역거점도시)이 다 가져갔다. 혁신도시니 공공기관이전이니 국가의 분권 정책에 해당되는 것들은 거점도시나 그 인근에 생겨 거점도시를 조금 더 크게 만드는 것에 역할을 하지 못했다. 거점도시가 커질수록 지역은 쪼그라들었다. 거점도시들은 인근 농촌 즉 제일 하위 구조에 있는 지역을 물, 전기 등의 에너지원, 혹은 쓰레기 소각, 화장장 등 혐오시설을 위치하는 데 적극 활용했고 그린벨트 등으로 묶어내는 데 사용했다.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하며 착취를 한 것이다. 지방은 마치 지역을 대변하면서 목소리를 내지만, 지역의 목소리는 철저히 은폐해왔고 필요에 따라 지방의 목소리에 얹히거나 덜어내면서 해당 도시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이용했다.

 그들에게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이란 서울과 광역 거점도시 간의 것이고, 지방과 지역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방에서 많이 가지고 와야 지역도 먹고 살 수 있다는 해괴망측한 이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혹세무민했다. 공간적 위계에서 지역 농촌 군단위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불가촉천민들이 사는 ‘향소부곡’이다. 

 그것은 제도권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강화되고 있다. 서울의 변방으로 지방을 위치시켜야 체계의 통치로 관할이 가능하지만, 관계성이 공고하며 자치의 물결이 휘몰아치기 쉬운 지역이 커지면 골치 아픈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서울과 지방의 구분은 엄밀히 말하자면 체계의 구분이다. 명확하게 이를 넘어서 본질을 꿰뚫는 대칭축을 찾는다면 서울과 지역의 구분이 더 적확하다고 볼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이 서로 대칭되는 체계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지역은 정서적 생활권을 오랫동안 다져온 관계의 공간이고 자치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사실상 지역소멸지역 89곳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지난 10월18일 행안부는 지역소멸대응기금을 10년 동안 무려 10조원을 조성하며 인구 감소지역으로 지정된 89개 자치단체에 지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큰 선심 쓰듯 이야기했지만, 막상 까놓고 보면 지자체당 연간 100억원 남짓 지원하는 셈이다. 이 마저도 한다면 어디냐 싶지만, 이런 기금의 사업들은 사실 연간 이래저래 내려져 오는 국비로 볼 때 그냥 많은 수치의 돈도 아니다. 그런데 행안부는 10년간 10조원이라는 숫자와 지역소멸대응기금이라고 명시하면서 마치 큰 대단한 일을 하는 것 마냥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제목과 부제만 봐서는 안 된다. 리드 문장에도 포함되지 않은 검은 속내가 흘리듯 끼어 넣은 문장안에 싹 밟힌다. 눈 밝은 이 아니면 찾지 못한다. 보도자료에는 '이와 함께 지역과 지역, 지역과 중앙 간 연계 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자체간 특별지자체 설치 등 상호협력을 추진토록 유도하고 지방소멸대응기금 광역지자체 배분 재원을 활용해 복수지자체간 생활권 협력사업을 적극 지원한다' 이 문장이 은밀하게 삽입된다. 이것은 사실 전해철 행안부장관이 브리핑한 내용 중의 핵심이다. 결국 대응책이라는 건 중핵도시와 메가시티로 귀결되는 것이다. 너희 인구 적으니까 인근 지자체와 통합하면 돈 더 줄께 이것이다. 사실상 89곳은 스스로 살아낼 수 없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고. ‘그러니 니들끼리 알아서 뭉치던지 아니면 큰 도시에 곁방살이 하든지 알아서 선택해’,  ‘이건 최후의 보루야’ 이런 협상카드를 들이민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떡밥인가. 지역소멸에 정부가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한다고 생색은 생색대로 내면서 기금을 미끼로 통합을 유도하는 이 멋진(?) 그림을 그리고서 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날 전해철 장관은 브리핑에서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낸다. 기자회견에서 박성호 지방자치분권실장이 답변하는 내용에 이것이 녹아들어 있다. 뭐락고 말했냐면 '저희 이번에 핵심포인트는 지역이 앞으로 지속가능해야 되는데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자체가 모든 것을 다 갖추겠다라고 하는 것은 이제 점점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 아닌가, 그래서 해당 지역이 조금 더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뭔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 그리고 특성화 발전시킬 수 있는 분야, 그 중심으로 해서 인구활력계획을 자체적으로 수립한다'는 것을 무려 핵심포인트라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브리핑이 이 정도로 나오면 사실 기자들은 나이브하게 89곳에 지방소멸기금 만들어 10조원 지원한다로 제목을 뽑을게 아니라 정부 인근 지자체 통합한다는 내용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언론들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부 언론들은 이런 내용을 간파하고 부추긴다. 정부 논리에 조응해 본격적으로 프로파간다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넙죽 받아먹는 언론과 지자체가 있으니 인근 빌빌대는 지자체를 삼키고자 야욕을 드러내는 도시들이다.  10월19일 동아일보를 보자.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일반적인 멘트를 하나 걸쳐주고 바로 전문가들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역의 인구감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역간 생활권을 묶는 이른바 메가시티 구성 등 다양한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은 10개 대규모 광역권 구축 전략을 추진하고 있고 영국도 주요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화룡정점의 멘트,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인구 감소지역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엔 지역간 협업과 연계가 필요하다. 정치적 문제나 지역적 이해 관계를 생각하면 상당기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메가시티 구축 등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말은 마치 정부를 은근히 비판하면서 메가시티를 부추기는 말로 마무리한다. 지역소멸대응책은  메가시티로 직진하기 위한 나름 포석인 셈이다. 

 경향신문이 야심차게 준비한 절반의 한국 기획기사 마무리도 흥미롭다. '메가시티 역시 새로운 위계 피라미드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고 문장을 살짝 걸쳐놓고 하지만, 수도권 일극체제 극복을 위해 선도모델이 필요하다는 반론을 제시한다. 경남연구원 김태영 미래전략본부장은 '메가시티 아니면 대안이 뭐냐고 묻고 싶다 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상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언론에 실린 전문가들 답을 모아보면 지역소멸의 답은 메가시티다. 중핵도시보다 더 큰 이름, 메가시티로 그 해결을 모두가 그야말로 원하고 있다. 정말 메가시티 아니면 답이 없는가. 난 그들이 정말 시군단위에 살아본 적이나 있는지 묻고 싶다. 도시에서 탁상행정을 하면 그런 이론이나 평론이 나올거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는데 그런 하나마나한 말들로 공론장을 어지럽히면 되겠는가.  

 통합과 효율, 이건 참 만병통치약처럼 군림해왔다. 지역 농촌은 돈을 쏟아 부어도 안 되는 밑 빠진 독이고, 결국 통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런 안일한 발상들이 농촌을 병들게 만든다. 지금까지 특화해서 뭘 해보겠다는 건 다 실패했다. 안 해본 것이 아니다. 체험형이든 농특산물이든 관광지든 지금 여전히 거기에 막대한 돈이 쏟아 부어지고 또 그렇게 망가진다. 돈이 들어오는 방향 자체가 틀렸으니 나가는 것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수밖에. 제발 농촌을 특화시키지 말아달라. 그냥 살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달란 말이다. 뭐 돈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린이집, 약국, 병원,  도서관, 치안센터, 우체국, 소방서 등 도시에는 당연히 존재할 것들이 없는 곳에,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마저 무너지고 있는 농촌에 무슨 특화니 이런 이야기 하지 말란 말이다. 그냥 최소한으로 살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줘도 있는 사람 떠나지 않는다. 오고 싶은 사람 오게 되어 있다. 

 메가시티 하고 인근 지자체 통합해서 특별지자체 만들면 지자체가 통합되니 인구는 별도로 통계내지 않아 소멸 이런 말은 없어질지 모르지만, 지역은 더 황폐화될 것이다. 사막처럼 될 것이다. 그나마 있던 기초생활서비스도 인근 도시로 다 빠지고, 그냥 도로나 메트로만 연결하여 도시에 기생하려 살라고 할 것이다. 베드타운으로 전락하는 그 곳에 삶이 스밀 수 있을 것인가. 문화적 다양성과 그나마 내려온 전통, 정체성은 다 사라지고, 오랫동안 형성된 생활권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급격히 도시화되며 농촌은 다 스마트 농장으로 바꾸면서 그것이 새로운 농촌 혁명이라 말하겠지. 특화하지 말고 정주여건 좀 개선해달라고. 작게라도 공공서비스 빼앗지 말아달라고. 키 작은 사람이 눈 코 입이 없는 게 아닌 것처럼 작은 지역에 사는 사람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다.. 자꾸 아랫돌 빼서 윗돌 괴려하지 말고, 보충성의 원리로 제일 아래 밑바닥에 있는 지역를 일으켜 세워주려는 노력은 커녕, 이건 그나마 있는 살림마저 다 거덜내려 하고 있다. 


 메가시티는 선거를 앞두고 실체적으로 성큼 다가오는데


 지난 3월부터 대전, 세종, 충남북연구원이 공동 진행한 충청권 메가시티 밑그림이 11월29일 나왔다는 기사를 접했다. 충청은 철도로 대전, 세종, 천안, 청주 등 거점도시를 30분 안에, 지역 곳곳을 50분 안에 닿을 수 있는 3050생활권을 형성하고 충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 8곳, 동서를 잇는 도로 3곳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춘희 세종시장은 광역에 이어 기초도 통합해 장기적으로 연방정부 체계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 사업의 근간에는 핵심코어를 더 강화하고 낙후된 지역에 ‘빨대’같은 교통망을 건설해 열악한 지역농촌을 쭉 빨아들이겠다는 계획과 다름없다. 핵심 코어는 더 강해질 것이고, 주변부는 열악해질 것이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군웅할거 하듯이 지역의 패권이 더 강화될 지도 모른다. ‘충청은 하나다’를 외치면서 대동단결하며 ‘서울보다 더’를 꿈꿀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극화 된 지역을 ‘지역소멸’이란 딱지를 붙여놓고 될성부른 거점도시에 통합하는 모양새다. 

 메가시티는 지역 농촌에 사는 주민들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잠식한다. ‘도시랑 빠르게 연결해줄게’, ’통합하면 너희들도 광역시민이 되는 거야’, ‘이대로 가면 어차피 소멸될거야. 그러니 우리랑 합치자 빨리 이동하면 편하지 않아’ 등 이런 달콤한 말로 현혹하고 있다. 결국 가장 먼저 지역농촌은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언론도 무비판적으로 메가시티 열풍에 동참의 뜻을 내비추고 있다


 드디어 경향에 이어 한겨레마저 메가시티전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많다고 생각한 건지, 이 전이 커다랗고 뜯어먹을 게 많다고 생각했는지 무려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와 한겨레신문이 공동주최까지 하면서 '메가시티리전 전략과 이행과제'를 모색한다고 한다. 메가시티는 이처럼 멋지게 포장되고 있다. 마치 지역소멸을 단박에 해결해줄 것 처럼 말이다. 1부에는 '균형발전과 자치분권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아마 소개될 모양인 것 같다. 2부는 '메가시티리전을 위한 지역 정책의 현안과 과제'이다. 벌써 정계와 학계, 그리고 자본과 언론은 결의를 한 모양이다. 메가시티를 하자고. 지역 소멸을 막자는 거창한 대의도 찾고 덩치도 키워서 그럴듯한 도시를 만들어보자고 말이다. 쪼그라드는 지역 농촌 고혈을 더 앗아가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행사는 무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주관 아래 국회, 국무총리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치분권위원회, 4차 산업혁명위원회, 스마트도시위원회가 후원한다. 이런 굉장한 후원과 설계로 지역 농촌을 훅 통합해버리겠다는 의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말 얄팍하고 단선적인 논리로 옛날에 지자체 통합하며 자치를 날려보냈던 그 정치를 이제 통크게 한번 크게 한판 벌여보겠다는 것이다. 마창진 통합, 청주 청원 통합, 제주특별자치도 이렇게 찔금찔끔 통합하는 걸로는 성이 안 찬 것이다. 얼마나 좋으냐. 안팎으로 '지역 소멸'이라고 계속 언론에서 다뤄대지, 중핵도시란 이론이 탄탄하게 받쳐주지, 이제 메가시티란 언어만 여론에 이식하면 그만인 것이다. 내년에 대선과 지방선거, 시기도 참 좋다. 무르익었다는 말이지, 아젠다 세팅이 이만한 적기가 없는 거다. 이슈가 없는 지선, 엄한 이슈로 괜히 공격받기 전에 메가시티로 밀어부치자고 대동단결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뭔가 바뀌겠다는 신기루와 상상은 많은 힘을 가지고 있거든. 연방제가 아니라 메가시티다. 자본이 다 먹어버리겠다는 꼼수다. 메트로를 연결하여 빨대를 들이밀어 삼투압 현상으로 돈과 힘의 농도가 짙은 곳으로 싹 끌어들이겠다는 심산이다. 그나마 버티고 지키고 있는 지역의 다양성과 정체성은 다 사라질 것이다. 농촌은 급격히 도시화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황무지가 될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균형발전은 무엇이고 지방분권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에 자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느냐 말이다.

 이 방식은 새로운 패러다임도 아니고 기존 방식의 강화에 불과하다. 복제 서울을 여기저기 만들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지역의 운명을 지역이 결정하게 존중해야 하는데, 아니 기초 지역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자치할 수 있도록 바탕과 환경을 조성하기는커녕 소멸과 통합의 대상으로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보충성의 원리로 기초 풀뿌리를 튼튼하게 하고 정주여건과 공공서비스를 작게나마 강화하는 역발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뿌리내린 다양성을 말살하며 버티고 있는 지역 고유성을 다 망가트릴 것이다.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이제 지역자결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애국 애족하지 말고 애향과 애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15분 도시’의 개별적 착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


 이는 최근 도시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 파리 얀 이달고 시장이 실천하고 있는 기초생활권 강화의 15분 도시와 완전 역행한다. 

 파리 소르본 대학의 카를로스 모레스 교수가 주창한 15분 도시는 도시를 소규모 생활권 단위로 나눠 주거, 문화, 건강, 교육 관련 공공편의시설을 조성하고 집에서 15분 내에 도보나 자전거를 이용해 갈수록 있다는 계획이다. ‘걸어서’와 ‘자전거’를 탄다는 이동 수단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데 이들은 시간에 방점을 찍고 빠르게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걷기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소규모 생활권을 조성하는 것은 기초단위 커뮤니티를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지만, 철도와 자동차 등을 이용해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은 광역이 기초를 다 꿀꺽 삼키겠다는 의도로 완전 상반대다. 전자는 코뮌을 강화하는 의미지만 후자는 메가시티를 하겠다는 야욕이다.  

 기후위기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도 이 정책의 차이는 확연하다. 부산에서는 파리 정책을 차용하며 시속 1천280킬로미터의 하이퍼루프 기술을 이용해 15분으로 단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데 이 정책을 이렇게 곡해할 수 있나 싶다. 

 결국 예산을 어디나 쓰느냐에 판가름이 난다. 소규모 생활권 강화정책은 기초단위의 생활권 편의를 강화하는데 쓰여 관계를 촉진시키고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반면, 메가시티 정책은 교통망에 대부분을 투자하게 되면서 토건업자와 코어에 사는 자본가들을 배불리는 정책이 될 것이다. 토건사업에 매몰되는 생태계와 농지를 생각한다. 그 예산으로 빼앗기는 복지를 생각한다. 지향과 방향 자체가 완전히 상반되는 정책이고 근간의 철학 자체가 배치된다. 15분 도시의 핵심은 걸어서 15분 이내에 학교, 직장, 의료, 상점 등 각종 여가시설 등이 존재해 주민들이 그 범위 안에서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시골 면 지역의 경우 마을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면 소재지에 이런 기본 공공시설을 갖춰놓고 무상 저상버스를 운영하면 될 것이다. 전동차와 자전거도로를 확보해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메가시티라니. 메가시티의 개념을 이해하면 옥천과 영동은 대전의 교통망을 따라 대전에 편입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지역의 정체성은 단박에 사라질 것이다. 베드타운으로 전락하며 객처럼 대전의 편의시설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메가시티가 실현되면 옥천에 있는 수영장과 영화관, 문화예술회관도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광역전철을 타고 너무도 쉽게 대전의 세련된 상업적 자본이 만든 시장과 공공편의시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게 반드시 좋은 것인가? 자기 제어권을 잃어버리고 자치의 길은 더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지역 안에 공공시설은 지역주민의 목소리로 피드백을 하면서 소통을 할 수 있는 구조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그냥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메가시티는 결국 코뮌을 죽이는 능력주의 도시설계


 정부의 기조는 너무나 분명하다. 균형발전과 분권을 명분으로 내걸고 수도권 외에 전국을 4분지계로 나눠 메가시티로 통치를 하겠다는 시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광역거점도시들이 몸집을 더 키우려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바깥으로는 행정안전부가 지역소멸도시, 인구감소지역으로 89곳을 낙인찍어놓고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메가시티를 제안하며 ‘양수겸장’을 하겠다는 시도다. 메가시티가 되면 그나마 남아있던 지역사회 근간을 이루고 있던 한줌의 풀뿌리 운동과 오랫동안 내려온 유구한 정서와 전통이 송두리째 없어질 것이다. 체계권력과 자본에 급속도로 편입되며 도박과 같은 선거에 동원되며 기능하는 유권자와 소비자로 전락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메가시티 정책은 잘 되는 놈 몰아주자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도시설계이다. 보충성의 원리로 기초를 더 튼튼하게 하고 모자란 것을 채워주며 스스로 완결성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열악하니 삼키겠다는 대표적인 약육강식의 모델이다. 

 장밋빛 미래만 그리면서 조금 더 자본과 권력에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기초 없는 광역은 존재할 수 없다. 튼튼한 기초가 모여 자연스레 광역을 만드는 것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광역은 기초를 통치하는 수직위계의 조직이 됐다. 이들의 합종연횡은 기초를 더 망가트릴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메가시티 담론을 그냥 그대로 놓아둘 것인가. 지역의 존폐가 걸린 이야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포장되어 흩뿌려지고 있고 이는 그대로 언론을 타고 공유되고 있다. 왜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는 없는가. 언론은 없는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직접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삶의 공간이 그냥 무방비상태로 무너질 것이다.


우린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지역의 개념을 재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로 다시 설정하고, 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은 저 너머로 보내고, 이제 자치와 자급, 협동과 연대, 순환과 공생의 가치를 꺼내들 타이밍이다. 그 전제로 우리의 목소리를 획득하고 지켜내고 순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자본들이 읍내 면 소재지까지 프랜차이즈를 진열하고 온라인 자본들은 하이퍼 로컬운운하면서 동네 골목까지 시장으로 편입시켰다. 지역은 그렇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자본들에 의해, 마을을 로망화하며 저항하고 투쟁하지 못하는 올망졸망한 공동체로 묶어놓은 권력 체계에 의해 한번 더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목소리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시대 트렌드에 맞게 한번 살아보려고 움직이는 어떤 사업적 측면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똑같이 했다가는 자본과 인력 측면에서도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지역은 최전선에 있다. 시골까지 내려온 프랜차이즈와 동네골목까지 누비는 하이퍼로컬이 시시각각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본으로 끌어들이고 있고 조금 더 큰 지역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편의성을 담보된다는 이야기로 메트로를 타고 메가시티 물결이 넘나들고 있다. 권력과 자본이 휘몰아치는 최전선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래서 지역에 맞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 공동체 지역학교와 공동체 저널리즘,  새로운 지역학이 이를 대체할 것이다. 이젠 민족자결주의를 넘어서 지역자결주의로 식민지로 오래전에 전락해 버린 이곳에서 새로운 자치 운동이 시작될 것이다.  미디어 운동의 방향은 이제 계급운동과 소수자 운동과 함께 지역 밀착형 자치를 어떻게 미디어에서 다양하게 구현할 것이냐일 것이다. 

 언론에서 공론으로 더 가까이 더 낮게 다가가는 일일 것이다. 씨줄과 날줄이 그렇게 얽어매질 때 다양한 삶의 그물망은 기본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탁상에서 그려놓은 지역, 대상화한 지역에 맞서 지역에 사는 우리는 밀착과 애착으로 자본과 권력의 힘을 극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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