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25. 10. 13.~10. 19.
내가 옛날부터 ‘글감 제시하기’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ㅇㅇ를 소재로/ㅇㅇㅇ~로 시작하는 글을 한번 써보실래요?’라고 권유하기를 좋아하는 거다. 북페어에서도 주관식 설문조사, 미완성 문장 완성하기, 첫 문장에 이어 쓰기 등등의 이벤트를 준비했고, 내 맘대로 무작정 백일장을 연 적도 있다(아무도 안 왔지만-_-). 심지어 사인에도 빈칸이 있음ㅋㅋㅋㅋㅋ
남이 나에게 뜻밖의 글감을 던져줄 때도 역시 의욕이 솟는다. 나에게 글감이란 ‘놀이재료’ 또는 ‘흥미로운 질문’ 같다. 미지의 입구이자 여행지 같기도 하다. <흑백요리사>에서 ‘두부’라는 미션을 받았을 때 요리사들이 느꼈을 법한 도전정신이 느껴진달까. 어쩌면 국어교사 자격증 소지자답게 일종의 선생기질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얘들아, 오늘은 이런 글을 써볼까? 어때, 재밌겠지?!’(십중팔구는 나만 재밌음)
0956. 오늘 낮에 뭐할까 고민했는데 부엌 청소를 끝내면 정말 보람차겠는걸? 내내 비 오다 2주 만에 겨우 해 떴는데 하필 이런 날 청소 삘이 꽂히는 거냐-_- 오늘은 꼭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야 되는데...
1839. 대박... 이번 주 한겨레21 읽다가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다시 열린다는 광고를 봤다! 헐 대박사건! 아싸!! 무조건 가야지!!(자세히 보니 퍼블리셔스테이블 기간이랑 딱 겹침-_-)
1012. 에세이를 쓰려면 꼭 ‘솔직하고 용감해야’ 할까? 소심한 사람도 에세이 써도 되지 않을까? 소심하면 소심하게 쓰면 된다. 그 소심함이 그 사람의 스타일이 될 수도 있다.
1226. <신인감독 김연경>에서 인상깊었던 해설. ‘이렇게 범실이 하나 났을 때 이 생각을 빨리 지우고 다른 플레이로 넘어가줘야 되거든요’ 음... 중요한 말이군.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렇게 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경기해야 되는 분위기가 선수들 입장에선 약간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리더의 작전 없이 각자 자기 마음대로만 하면 질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선수 자신에게도 안 좋긴 하겠네. 리더의 역할이 그런 거구나. 상황과 흐름을 넓은 시야로 보고, 각 포지션의 상태를 파악해서 작전을 짜는 것. 팀원들이 헤맬 때 구체적인 솔루션을 주는 것.
(퍼블리셔스 테이블 첫날. 단체 참여라서 여러 작가가 순번대로 부스를 지키기로 함. 나는 이날 정오부터 3시간 담당이었음)
11시 이전에 도착하려고 한참 일찍 나왔는데 지하철 반대로 타서 지각의 위기를 겪음. 서울살이 20년에 아직도 2호선 내선 외선을 구분 못하다니! 한참 가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당혹+자괴감+망연자실... 그래도 그 와중에 빨리 다른 경로 검색해서 시간 맞춰 온 건 기특하다.ㅎ
실내공간이 생각보다 협소해서 테이블이 빽빽한 게 약간 아쉽긴 한데 야외 분위기가 끝내줌.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앞에 펼쳐진 초록 잔디밭과 언덕... 그 한쪽에서 열리는 낭독회... 커피와 빵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부스들... 대형 현수막... 등등. 오후에 시간이 꽤 남아서 북페어 구경도 하고, 대파와 멸치(???)를 올린 포카챠를 팔길래 신기해서 사먹어봄.
북페어 참여팀 중에 내 책 받아주신 책방들 찾아가서 인사하고 책 삼. 이런 큰 행사를 주최한 스토리지북앤필름 마사장님은 너무 바쁘실 것 같아서 인사만 하고, 이후북스에서는 [마음껏 틀리는 일]을 사면서 황부농·상냥이 사장님들과 피아노 얘기 하고, 에이커북스토어에서는 사장님이 그려서 제작한 엽서북 [전주의 특별한 도서관들]을 사면서 책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한옥 그리기가 그렇게 까다로웠다고). 붙임성이라고는 1도 없는 내가 그래도 이 정도 스몰토크는 하게 됐다는 게 다행이랄지...
지도를 보니 도서관 옆에 몽마르뜨공원이라는 곳이 있어서 한번 가봄. 그렇게 계단이 많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붐비는 행사장에 있다가 한적하고 초록초록한 공원에서 책을 읽는 기분은 매우 좋았다. 빗방울 떨어져서 몇 장 못 읽고 내려오긴 했지만 ㅎ
(이후 본가 방문~~ 엄마 생신 기념 외식~~ 1박2일 놀고먹음~~)
퍼블리셔스테이블 마지막 날. 오후 2시부터 당번이라서 그 전에 용산cgv에 들러 미쟝센단편영화제 상영작 중 <고양이를 부탁해5>를 봤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아예 안 가기는 아쉬워서 약간 무리를 해봤다. 아무거나 제일 일찍 시작하는 걸로 예매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들이 다 좋았다.
시네필까지는 아니지만 이 영화제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아쉬웠는데, 이렇게 재개돼서 기쁘다. 영상분야 지망생들은 다 유튜브 쪽으로 몰려간 줄 알았는데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직 이렇게 많았다는 것 자체가 왠지 희망적인 느낌이다.
기념품 매장 스태프 분께 영화제 프로그램북은 없냐고 물어보니, 위층 데스크에서 준단다. 알고 보니 씨네21 한 권을 미쟝센 특집으로 만든 거였다. 모든 상영작들의 시놉시스와 감독 인터뷰가 다 모여 있었다. 심지어 영화제 관객에게는 공짜로 준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아싸~!”라고 외쳤다...ㅋㅋㅋㅋㅋㅋㅋㅋ
뜻밖의 득템을 하고 기분좋게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갔다. 앞시간대 당번을 맡은 작가님이 방금 처음으로 책이 팔렸다며 도파민이 풀충전되어 계셨다...ㅋㅋㅋㅋ 암요암요 신날 만하죠. 광명북페어 때도 일기에 썼지만 이 수많은 책들 중에서 누군가가 내 책을 발견해서 사간다는 것 자체가 진짜 대단한 일 아닌가!
내 시간이 끝난 뒤 잠깐 숨을 돌리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럴수가! 입장 대기줄이 건물 뒤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재입장 포기하고 낭독회를 듣다가, 마감시간을 앞두고 대기인원이 줄어든 걸 보고 잽싸게 들어갔다. 마지막 날인 만큼 부스들을 나름 꼼꼼히 둘러보고 책들을 더 샀다. 구하지 못했던 <계간홀로> 최근호를 스토리지북앤필름 부스에서 발견했을 땐 ‘다 이루었다’ 싶었다.
남양주여유당북페어, 광명아트북페어, 서울퍼블리셔스테이블. 올해의 북페어는 여기까지다. 6월부터 지금까지 ‘책 만들기’라는 여행을 신나게 즐긴 기분이다. 때로는 빡세고 때로는 즐겁고 가끔은 실망도 하고 보람도 느낀 시간들이었다. 내년에는 다른 책도 만들고 북페어도 더 일찍일찍 신청해서 제주북페어도 가보고 언리미티드에디션도 도전해봐야지. 언리밋은 너무 치열해서 안 뽑히겠지만...ㅎ
안녕하세요. 이제입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낙서하듯 쓴 일기임에도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작년 12월부터 매주 한 편씩 브런치 발행을 이어 왔는데요. 앞으로 한두 달 정도는 그림에 집중해볼 생각이라 잠시 브런치를 쉴 예정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