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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Oct 04. 2024

나 자신과 대화하기

공룡능선 혼등 이야기

이 글은 지난 2022년 이맘때 혼자 공룡능선 산행을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올해도 가려고 하다 2년 전 그때가 생각나서 글을 남긴다.



마음 비우기 출발


가끔 내 영혼은 내게 말한다. 나와의 시간도 가져달라고. 그래서 가끔은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혼등이 필요하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른다. 생의 절정에 선 마지막 짧디 짧은 애탄 몸짓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던 것일까.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라고 말하는 도종환의 시 <단풍 드는 날>이 떠오른다.


SNS에 단풍이 장관인 공룡능선 사진을 보니 지기 전에 가서 봐야지 했는데 이슈가 없는 날이 수요일이다.


"그래 평일에 가면 오롯이 즐기겠다."


결심이 어려울 뿐이지 결정하고 나면 모든 건 쉽다.


단 두 시간 반 만에 설악동이다. 어느새 설악의 이 신선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아침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량없이 기쁘다. 옆집에선 김밥도 판다. 김밥 하나를 배낭에 추가로 넣고 출발이다.


혼등의 장점 첫 번째, 자유


평일이어서인지 등산객이 많이 없다. 그나마 보이던 사람들도 비선대에서 금강굴 쪽으로 방향을 틀자 한 명도 안 보인다. 오! 진짜 혼등이네ㅎ


그런데 오르다 보니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길에서 참 많은 팀을 만났다. 역시 공룡능선은 인기 루트이다.

오색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해 대청봉을 넘어 공룡능선으로 들어섰던 3년 전과 달리 이번엔 여유롭게 설악동에서 아침도 먹고 금강굴 쪽으로 오르니 아래에서부터 공룡능선의 웅장함을 감상하며 걷는 맛이 색다르다. 아침햇살을 받은 공룡능선만의 멋에 빠지고 기대감이 더해져 설레기까지 한다.


오르다 세존봉 밑 공룡능선의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조망 포인트 바위에 유유자적 앉아 사과를 한입 베어무는순간, "내가 지금 신선이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여유로움과 경치를 두고 금방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유유자적 한참을 쉬었던 공룡능선 안뜰의 조망바위


혼등은 이래서 좋다. 어디든 마음 가는 곳에서 이곳이 목적지인 마냥 정지해 즐길 수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쉼을 얻은 후 다시 출발, 10시 반쯤 공룡능선이 끝나는 마등령삼거리에 도착했다.


나도 저분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공룡능선에서 있을 여러 놀라운 만남 중 첫 만남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공룡능선으로 들어서는 찰나 90대쯤 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내려오신다. 이 시간에 공룡능선을 끝내셨다니 대체 어디서 시작하셨을지 너무 궁금하다. 희운각 대피소가 아니라면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어오거나 설악동에서 천불동계곡으로 오셔야 하는데 놀랍다.


"벌써 공룡능선 타셨습니까?"


대답은 짧다.


"네"


이 할아버지 대단하시다. 궁금하다.


"어디서 오셨어요"

"새벽 3시에 오색에서 출발했어요"


단마디 대답에 모든 게 들어있다. 역시 내공이다. 7시간 반 만에 대청봉과 공룡능선을 주파하셨다. 나도 저분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돌아본다. 배움이 크다.


한 달 놀아보고 지친 사람들이 찾은 일


새 핸드폰이라 사용방법을 이리저리 보다 셀카 방법 하나를 배웠다. 카메라를 향해 손바닥을 펴 들면 자동셔터로 사진이 찍힌다. 오! 이거 써서 셀카 찍어야지, 가져간 원숭이 삼발이를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펴니 진짜 찰칵이다. 오! 신기ㅎ 근데 멀리선 인식을 못한다. 좋다 말았다.


산에선 처음 보는 사람도 낯설지가 않다. 부부인지 연인인지 젊은 두 남녀가 마주 지나간다. 날 보며 웃으며 말을 걸길래, 오, 잘됐다 싶어 사진을 부탁했다. 여자분이 자기도 찍어달라면서 아찔한 바위 위에 선다. "잘 나왔네요" 하면서 주니 "오늘 인생컷 하나 남겼다"면서 만족해서 간다.


공룡능선 초입에서


초입에 헬기가 하늘을 빙빙 돌아서 뭔 헬기일까 궁금하던 차였었는데, 앞에 가던 할아버지 두 분과 우연히 얘길 나누게 됐다. 놀랍게도 이 두 분이 아까 그 헬기에서 내린 분이다.

등산로 정비 공사를 하는 분들인데 길 공사하러 가신단다. 자신들이 공사 위치에 가서 헬기를 부르면 헬기로 공사 자재를 내려준단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고 이 일을 하신단다.


"한 달 놀아봤는데요 와!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일이 운동이고 운동이 일이 된 노익장 분들이다. 누구라도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무기력증에 빠진다. 이분들처럼 일을 하되 즐기면서 있다면 최상의 일이고 인생일 것이다.


공룡능선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 암릉의 연속이다.(사진 2019년)


급조된 산행 친구가 한 말


희한한 인연도 있었다. 멀리 거제도에서 어젯밤 속초에 와서 오늘 중청에서 자고 내일 간다는 분을 만났다. 또 아까 오르면서 전망 포인트 바위에서 잠깐 본 분을 다시 만났는데, OO공사 속초지사에 발령받아 속초에 대한 예의로 공룡능선에 왔단다.


다 혼등이다. 쉬고 가다 보면 또 만나고 사진 찍고 가다 보면 또 만나고 자꾸 만나다 보니 나중엔 셋이 마치 일행처럼 같이 걸으며 사진도 찍어주며 이런저런 얘길 나누게 되었다.


속초지사 간부가 한마디 한다.


"걸을 땐 격식도 지위도 복잡한 일 생각도 모두 잊고 걷기에만 집중해서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정답이다. 그게 힐링이다. 그게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속초지사 분은 무척 예의 바르고 배려 깊다. 거제도 분은 무척 내성적이고 겸손하다. 마치 내가 산행대장이 된 듯 가다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 "여기서 쉽시다" 하고 쉬고, "사진 하나 찍어주세요" 하면 "저도 찍어주세요" 하고 찍으면서 같이 걷는다.


이렇게 혼등의 또 다른 좋은 점은 개방성이다. 처음부터 일행이 있으면 일행 안의 나로 울타리가 형성되지만 혼자 산행하면 저절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또 오픈마인드로 편하게 산행하는 모두와 친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면
자기도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빌 코플랜드


2019년 가을 대청봉-공룡능선 코스로 걸을 때


공룡능선이 끝나갈 무렵, 노인봉을 지난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속초지사 분이 커피를 제안한다. 내가 고구마를 건네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가 마련됐다. 안 그래도 커피가 고팠는데 너무 고맙다. 급조된 산행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눈다.


공룡능선 신선대에서(2022년)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만나는 것


어느새 공룡능선이 끝나고 기나긴 천불동계곡을 감탄하며 내려온다.


하산하며 본 천불동 계곡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있다(2022)


난 공룡능선을 처음 탔을 때


"지상에선 상상할 수 없는 천상의 세계, 신선의 세상이야"


라고 감탄했다. 거기에 단풍까지 들면 기암과 단풍의 조화가 압권을 이루겠지만 그때 그해엔 날씨 탓에 단풍이 잘 안 들었고, 오늘은 아직 단풍은 초입에 들어선 것 같다. 아마도 이번 주말엔 절정이지 않을까.


단풍이 매년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것에는
엄청나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조 휠러


향수를 자아내는 그 단풍을 다음번엔 마음껏 보고 싶다. 그럼에도 서울 올라오는 길이 모든 걸 다 이룬 것처럼 마음이 흥겹고 가볍다. 오늘 나를 위한 시간에 오롯이 나에게 충실했다는 만족감과 충족감이 번진다.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과정이 아니다. 지금이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이 순간을 느끼고 즐길 수 없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나 자신과의 대화도 가만히 앉아서 공상하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가 많이들 얘기하듯 심리적 자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미래의 성공을 위한 과정인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걸 떠나 순수한 상태에서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만나는 진정한 힐링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걷는 행위 역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내 몸을 움직여서 걸으며 자연삼라만상을 만날 때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무흠의 상태에서 객체를 인지하는 본체인 나를 만나게 되고 그럴 때 내 영혼이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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