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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Jan 12. 2019

6부의 제본

사무실에 긴박감이 감돈다. 몇 시간 뒤면 중요한 보고 미팅이 있었다. 상사 중 한 명이 나에게 보고용 문서의 용수철 제본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수철 작업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보고 문서를 인쇄할 때 까지만 해도 작업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인쇄 다음 작업에서 발생했다. 제본을 위해 종이에 구멍을 뚫고 용수철을 끼워야 하는데 누구도 기계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달려들어 사용법을 연구해 알아내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기계는 생각 이상으로 비효율적으로 설계되어있었다. 구멍은 한 번에 10장씩만 뚫을 수 있었다. 용수철도 10장씩 손으로 직접 끼워줘야 했다. 한 부에 100장이 넘는 PT 자료를 6부 이상 만들어야 하는데 대체 몇 번의 기계 조작과 수작업이 필요한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잡히는 대로 구멍을 뚫고 용수철을 끼워 넣었다. 남은 20분간은 시간에 맞추기 위해 모든 팀원이 작업에 동원되었지만, 사람 숫자와 작업속도가 비례하는 종류의 작업은 아니었다. 한 시간 반이나 남았던 시간은 불과 2~3분가량 남아있었다. 


마지막 6번째 제본작업이 내 손 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은 급한데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애매한 상황. 급기야는 미팅을 떠나는 일행 다섯 명이 내 작업과정을 지켜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색한 침묵과 덜컹거리는 용수철 소리만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뒤통수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빨리 만들기 위해 손을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10장씩밖에 구멍이 뚫리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종이를 끼워줘야 하는 제본 기계에 저주를 퍼부으며. 


출발할 시간이 10분쯤 오버 되었을 때 불현듯 일행 중 가장 직급이 높은 한 명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야 됐어. 그만해.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들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짜증스러운 눈빛, 나 대신 날 부끄러워하는 표정. 이내 그들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에도 나는 기계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홀로 널브러진 종이들과 함께 사무실 입구에 남겨졌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6번째 문서를 통째로 이면지 통에 쑤셔 넣었다. 작업 중에 기계에 부딪힌 손가락 관절이 욱신거린다. 


반대쪽 손도 종이에 베었는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추울 정도로 강하게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하나씩 주우며 이곳에 내가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냥 조용히 현장을 정리하고 내 자리로 돌아가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주무르면 되는 걸까. 그날은 그런 당연한 사실이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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