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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경험하기

by 신인규

고통을 회피하는 본능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회피 성향은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발달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위험하거나 해로운 자극을 회피함으로써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러한 회피는 장기적으로 더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수술이나 치료의 일시적인 고통이 무서워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끝내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겪게 될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불쾌한 감정이므로, 회피하기 위해 마음 한편으로 제쳐두거나, 마음 속 어딘가에 꾹꾹 눌러담고 덮어두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회피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디엔가 잠재되어 있다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납니다. 그 때는 훨씬 더 크고 강력한 고통으로 나타나, 더 이상 회피하거나 잊어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파티의 불청객 다루기


'기꺼이 경험하기'는 이러한 심리적인 회피 성향을 인식하고, 불편한 경험과 직면하며 수용하는 자세를 촉진합니다. 수용전념치료(ACT)의 창시자인 스티븐 헤이스는 파티장의 불청객 비유를 통해 기꺼이 경험하기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티를 여는 호스트는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파티장에 다양한 손님들이 도착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불청객이 나타나 파티장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습니다. 호스트는 불청객을 억지로 내쫓거나 통제하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파티의 흐름이 끊기고, 다른 손님들과의 상호작용도 방해받게 됩니다. 반대로 호스트는 불청객을 포함해서 모든 손님을 환영하고, 그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려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발견했을 때 호스트는 마음이 움찔하겠지만, 일단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른 손님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안내하고 나면, 곧 안정을 되찾고 파티가 조화롭게 진행되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호스트는 자신의 삶이라는 파티를 주최하는 개인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손님들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 감정, 기억 등을 상징하죠. 때로는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불청객)이 파티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부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통제하려 하면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파티 주최자가 모든 손님을 환영하고, 그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려는 태도를 취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내적 경험을 수용하고, 그들과 유연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파티장의 불청객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입니다.


고통을 경험하는 방법


D씨에게는 살아오면서 겪었던 두가지의 큰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배우자의 폭력과 폭언이었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자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상실의 아픔이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폭력과 상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서 D씨를 괴롭혔습니다. D씨는 심리적으로는 심각한 불안과 우울을 겪고 있었으며, 신체적으로는 팔과 다리의 마비와 경련, 극심한 허리 통증, 호흡곤란 등의 증세를 겪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도 신체 증상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D씨의 증상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상처를 입은 상태를 의미하며, 상처가 되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상처를 떠올리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상담자로써 저는 D씨에게 트라우마 기억과 상황에 점진적으로 접근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의미와 맥락을 재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물론 불안과 공포, 우울을 다루는 기술을 학습하는 것도 필요하였습니다.


초기 상담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자세하게 얘기하며 접근해 가던 D씨가 갑자기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 속에 꾹 담아두고 잊어버리려고 했던 오래 전 일들을 다시 꺼내 놓으니 심적인 고통이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불안과 우울에 더해 분노와 절망, 그리고 회한의 감정이 가슴 속에 사무치도록 올라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내담자가 과거의 상처에 접근해 들어갈 때 심적인 고통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일입니다. 그럴 때는 우선 소용돌이치는 부정적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학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D씨가 아침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명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명상 음악을 들으며, “내가 참아야지, 모두 잊어야지.”라고 반복적으로 되뇌인다고 했습니다. D씨는 명상을 통해 의식적으로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원래 방어기제는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의 차원에서도 과거의 상처를 누르고 억압하는 명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얀 곰 실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얀 코끼리 실험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1987년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Daniel Wegner)가 수행하였으며, 생각 억제의 역설적 효과를 탐구했습니다. 이 실험의 참가자들은 5분 동안 '하얀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받았습니다. 동시에, 하얀 곰을 생각할 때마다 벨을 울리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참가자들은 하얀 곰을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으며, 이는 특정 생각을 억제하려는 시도가 그 생각의 빈도를 증가시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기꺼이 경험하기(willingness)’는 최근 심리상담에서 널리 활용되는 수용전념치료(ACT)의 치료기법 중 하나이며, 생각 억제의 역설적 효과를 가장 잘 반영한 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내담자가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내적 경험을 회피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이러한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D씨는 명상하는 방법을 바꿔서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D씨의 명상은 내적인 고통을 억누르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D씨는 자신의 내적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기꺼이 경험하기위한 명상으로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그런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 차리고, 충분히 경험하고, 다시 놓아주는 방식으로 명상을 함으로써 내적인 고통을 점차 완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적인 고통을 반복적으로 기꺼이 경험하는 것은 내담자가 그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상처와 부정적 감정이 떠오를 때 먼저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감정을 느낄 때 자신의 신체상태를 느껴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소름이 끼치고, 배가 아프고, 열이 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기꺼이 느껴봅니다. 그 감정이 무슨 색깔인지, 어떤 분위기와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떠들고 있는지,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질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리 저리 생각해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생각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는 마치 시냇물에 나뭇잎을 떠내려 보내듯이 그 생각을 서서히 놓아줍니다.


천천히 접근하기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불안장애의 일종입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호흡이 가빠지며, 어지러움, 땀 분비, 손발 떨림 등의 신체 증상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공황장애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생물학적 요인(유전적 요인,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심리적 요인(스트레스, 트라우마), 환경적 요인(중요한 삶의 변화, 사회적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씨는 공황장애 증상 때문에 백화점에 가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백화점에서 자유롭게 쇼핑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불안하고 두려운 장소로 바뀐 것이지요. 백화점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급속도로 불안해지고, 숨이 막혀서 호흡을 하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K씨에게 행동치료의 일환으로 단계적 노출치료를 적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백화점에 대해 상상하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예전에 가보았던 백화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백화점 사진과 영상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심한 불안을 느끼며 더 이상 백화점에 대한 상상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식호흡과 이완기법을 통해 불안을 완화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백화점 전반에 대한 이미지가 아닌, 출입문, 안내 데스크 등 부분적인 요소에 대한 이미지로 노출의 대상을 조절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상상을 하는 빈도와 시간을 조금씩 높여 나갔습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그는 백화점에 대한 상상을 어느 정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초기 단계에서 힘들어했던 백화점 사진과 영상도 편안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실제로 백화점에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한번은 백화점 근처의 버스 정류소까지 가보았고,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백화점 입구까지 가보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단계에서 K씨가 느끼는 불안에 대해 탐색하고,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안이 감소하는 과정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심리 치료의 효과와 자신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백화점 입구에서 어느 정도 불안이 감소되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던 K씨는 드디어 백화점 1층으로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첫번째 시도를 위해 친구와 동행하였습니다. 친구에게는 K씨의 불안 정도를 관찰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K씨의 바로 옆에서 동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공황발작이 발현되면 즉시 그를 백화점 밖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부여하였습니다.


K씨는 그때까지의 노출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느꼈지만 불안감도 함께 느끼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1층 정문을 지나고, 화장품과 명품 매장을 천천히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여전히 불안감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괜찮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감이 조금씩 더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K씨와 친구는 그 지점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번 방문 때에는 백화점 2층까지 올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서 한 손으로 난간을 잡았습니다. 이윽고 그는 2층에 도착하였습니다. 2층에는 명품 매장과 여성 의류 매장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매장과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예전의 공황장애를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였습니다.


공중 목욕탕의 온탕에 들어갈 때 처음에는 물의 온도가 너무 뜨겁게 느껴지지만 온몸을 담그고 조금만 지나면 몸이 온도에 적응하며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K씨는 백화점 2층에서 느꼈던 느낌을 온탕에 들어가서 적응하던 순간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이것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기꺼이 경험하고 수용하기를 선택한 내담자가 느끼는 치유의 순간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설명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K씨는 치유를 위해 더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불안과 공황발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담자로서 저는 K씨의 용기와 변화에 대해 칭찬하고, 앞으로의 단계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였습니다. K씨가 언젠가는 반드시 불안과 공황장애를 극복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단계적 접근의 한 사례입니다. 단계적 접근은 내담자가 두려움을 느끼는 자극에 대해 체계적 둔감화(Systematic Desensitization)를 통해 점진적으로 노출되는 방법입니다. 불안 수준을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점차적으로 감소시키며, 두려운 자극에 대한 내성을 키웁니다.


이와 상반되는 접근으로 홍수기법(Flooding)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나 자극에 즉각적으로, 장시간 노출시키는 방법으로서, 강렬한 노출을 통해 급격히 높아진 불안 반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소하도록 유도합니다.


저는 ‘기꺼이 경험하기’는 홍수접근과 같이 갑작스럽게 즉각적으로 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단계적으로 서서히 접근해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경험을 수용하는 데에는 개인차가 있으며, 갑작스럽고 강도 높은 노출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별로 현재 상태와 수용 능력을 평가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계적으로 내적 경험에 노출되면서, 점진적으로 심리적 유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작은 성공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기 효능감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기본 아이템


중요한 것은 과거와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도 내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경험하고 흘려보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꺼이 경험하려는 마음 없이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떠오르는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고 바라보고 흘려보내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고통은 견딜만한 것으로 바뀌고, 이전과 같은 불편과 통증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죠. 일단 그런 경험을 한번 하고 나면 ‘기꺼이 경험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한번 가본 길은 더 편하고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죠. 처음이 두렵고 힘들지만 두번째, 세번째는 좀 더 괜찮습니다.


저는 ‘기꺼이 경험하기’가 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본 아이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피하고, 억압하고, 부인하고, 격리하고, 합리화하는 수많은 방어기제들은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삶의 진로를 더 좁게 한정시키고, 대인관계를 취약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됩니다. 마음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눈을 감고 그 감정을 떠 올리며 기꺼이 경험해보기를 권해봅니다.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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