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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Sep 16. 2023

맘카페 스파이

  주말이 다가오자, 가족과 무슨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좋을지 묻는 글이 맘카페에 올라왔다.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고르는 건 생각보다 까다롭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다면 미성년자가 관람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해도 혹시 모를 낯 뜨거운 장면이 없을지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추가적으로 확인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모두 미션 임파서블을 추천하고 있었다. 야한 장면은 없는지 되묻는 댓글이 달리자, 키스신은 없다고 안심시켜주기도 하고 춤추는 장면에서 실루엣이 야해 보인다고 귀띔해 주기도 한다. 내가 보려고 벼르던 영화는 야한 장면이 하나도 없음에도 카페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지만, 난 모른 척 꿋꿋하게 댓글을 담겼다. “전 바비 보려고요~.”


  나는 엄마다. 하지만 내가 엄마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어색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나는 분명 엄마가 맞는데,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익명의 엄마들을 생각하면 과연 그들과 내가 엄마라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특히 ‘맘카페’로 대변되는 엄마 집단을 떠올리면 그렇다. 수시로 맘카페를 들락거리며 글을 읽고 하트를 누르고 댓글을 달면서도, 내가 이 집단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마음 한쪽에서 가시질 않았다. 


   영화 취향이 어긋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었지만 종종 문제가 되었다. 인어공주 실사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디즈니가 원작 애니메이션을 얼마나 망쳐놓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한 엄마가 카페에 글을 올렸다. 애리얼 역을 맡은 배우가 못 생겼다는 말과 함께, 개봉 예정인 다른 디즈니 영화에는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고 들었다며 혐오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지나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변하려면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엄마들이야 말로 변화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글쓴이는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을 테지만, 나는 모범답안을 달기 위해 심사숙고 했다. 원초적인 혐오 표현에 지나지 않는 글이라 그와 내가 평등에 대한 혹은 다양성에 대한 논쟁을 할 단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단어를 더 고심해서 골랐다. 훈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는 글쓴이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모두의 정곡을 찌르고 싶었다.


  그렇게 댓글을 달고 나면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초조해졌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맘카페 엄마들과의 불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인어공주 글은 글쓴이가 댓글을 확인하고 글을 지워버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내 댓글 작전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난 석연치 않았다. 사실 이러쿵저러쿵 내 머릿속만 시끄러웠지 인터넷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내가 맘카페 회원과 대단한 논쟁을 가졌거나, 누군가 나를 공격했거나, 혹은 진절머리 날 정도로 추하게 서로를 헐뜯느라 보기 불쾌했던 적은 전혀 없다. 정서적 손상을 입거나 온라인을 벗어난 실질적 피해를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나는 맘카페에 쉽사리 마음을 내주지 못했다. 맘카페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볼 거라고 누군가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분위기에 못 이겨 억지로 가입한 것도 아니다. 지역 엄마들이 많이 활동하는 맘카페를 찾아내서 자발적으로 가입해 놓고, 나에게 시비조차 걸지 않은 맘카페에 나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내가 맘카페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맘카페라는 단어에 묻어있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부터 들어온 ‘맘카페’라는 단어는 가령 ‘햇살’과 같은 단어처럼 마냥 좋은 의미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맘카페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가족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서로 두둔하거나, 공격성(혹은 수동 공격성)을 띈 후기 글을 올려서 특정 업소에 피해를 준 사례들이 알려졌고 맘카페 속 엄마들은 자식에 눈이 먼, 선동되기 쉬운 존재로 그려졌다. 맘카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진상 엄마만 잔뜩 모여있는 공간이라는 섣부른 판단이 자리 잡았다. 문제를 일으킨 카페 회원들이 곧 전체 맘카페 가입자들을 대표하게 되었고 그 오명은 쉽게 모든 엄마들에게 번졌다. 엄마가 된 이상 이런 오명이 나에게 닿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맘카페에 속해 있는 엄마들과 나를 구분 짓고 싶었다. 유독 불편한 글들만 눈에 들어오는 것도 그래 서였을지 모른다. 그런 글들로 인해 나는 카페에서 쉽게 어울리지 못했지만, 다른 엄마들이 간과하는 것을 나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일종의 우월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내 취향의 영화가 다른 엄마들에게는 주류가 아닐 때 느끼는 소외감은 내가 그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임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맘카페가 일으킨 말썽이 기사화되고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면 맘카페와 분리되려는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그 비난이 나에게 향하는 것처럼 안절부절하 지를 못 했다. 그리고 곧 나는 맘카페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맛있는 동네 식당이나 용한 병원과 같이 그들이 공들여 나눠주는 정보는 취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선을 긋는 게 거리꼈던 탓일까? 실망스러운 글을 발견하고야 말면서도 마음 붙일 수 있는 글을 기대하며 다시금 게시물을 들여다보게 되는 마음을 나도 알 수 없었다. 맘카페를 둘러싼 논란을 비판하면서도 비판이 쌓아 올리게 될 혐오를 염려하느라 크게 목소리 내길 주저했다. 맘카페를 대하는 내 태도는 이중생활을 하는 스파이처럼 비겁했지만, 스파이 노릇에는 형편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련 없이 발을 빼야 하는데 폭격으로 진흙탕이 된 현장에서 적군을 구하려고 다시 발길을 돌리는 셈이었다. 다만 내가 구하고 싶었던 것은 진상 엄마도 갑질 엄마도 아니었다. 멸시의 눈초리에서부터 엄마라는 단어를 구하고 싶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맘카페를 중심으로 일어나면, 마치 그런 일은 인간 역사상 다른 집단에서는 목격된 적이 없는 것처럼 세상은 엄마 집단을 뭉뚱그려 도마 위에 올린다. 엄마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 공동체에서는 모두 정답만 말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엔 형편없는 사람들이 원래 많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 잘못된 정보에 호도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엉망진창인 글들로 도배되어 있다.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는 논란을 일으켜도 온라인상의 악동과 같은 이미지를 얻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임에 반해 맘카페의 논란은 인터넷 공간을 떠나 현실세계에 있는 엄마들을 손가락질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확신하건대 세상은 엄마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 것 자체를 아니꼽게 바라본다.


  나부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단단한 오해가 있었다. 오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깝다. 엄마는 언제나 사려 깊고 옳은 결정을 내릴 거라는 환상. 나는 엄마들이 현실에서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면서, 막연히 엄마들은 응당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잣대를 갖고 있었다. 엄마가 되면서 한 다짐들이 아직은 생생했기에 내가 세운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고작 1년 반 정도) 유지해 왔고, 난 결국 이토록 건방져졌다. 이미 산전수전 겪고 매일같이 하루를 살아내느라 전쟁을 치르는 엄마들에게 자식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기를, 혐오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만큼 깨어있기를, 상업 문화뿐 아니라 개성 있는 인디 문화에도 조예가 깊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나.


  내가 맘카페에서 느낀 불편은, 보도블록 중 하나가 패턴 상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찝찝함 정도에 비할 수 있다. 잘못 들어간 보도블록에 집착하면 엄청난 호들갑을 떨 수 있지만, 실제로 나머지 블록들은 모두 패턴에 맞게 잘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아채면 조금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 엄마들이라면, 여자라면,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을 만큼 청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블록 한 두 개에 집착하게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맘카페가 정치 이야기를 금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대화의 소재를 검열하고 있다. 즉, 잘못 들어간 블록이 애초에 한 두 개도 안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골치 아플 일이 없어서 좋긴 하지만, 소란스러운 일을 최소화하려는 카페의 노력은 유독 여자들에게만 요구되는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도 할 말이 턱까지 찬 여자들은 할 말은 하고야 만다. 정치글이니 삭제하라는 댓글로 옥신각신해도, 많은 엄마들이 핵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유명한 뮤지션이 같은 말을 했을 때 여당 대표가 공격하는 걸 보면 정치글이 맞는 걸까). 북한 위성 발사에 대해 서울시에서 긴급재난 문자를 오발송 했을 때에도 잘했느니 못 했느니 댓글이 줄줄 달렸다. 9월 4일을 앞두고는 공교육 멈춤의 날을 지지한다는 글들로 교육부 비난에 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뭐라고 엄마라는 단어를 구한다는 사명감으로 엄마들에게 일침을 놓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을까. 모든 엄마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못 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면 난 어떤 엄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엄마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 내가 엄마 집단에 완벽히 스며드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오만함을 뉘우치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적어도 이제 스파이짓은 확실히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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