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물에 잠긴 사막 위를 떠 다니다
작년 말에 급한 나머지 공사(工事) 전에 구체적인 설계(設計)도 하지 않고 단지 창조(創造)의 의욕(意慾)과 즉흥적(卽興的)인 영감(靈感)에 발분(發憤)하여 욕실(浴室)과 화장실(化粧室)을 군데군데 깎아내고 뜯어 붙였는데 느닷없이 안방에 건자재(建資材)가 들어 차기 시작하자 마님이 기겁(氣怯)하여 화장품 몇 개와 속옷만 챙겨서 작은 방으로 옮겨가 피난살이한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그간 얼결에 안방을 빼앗기고 난데없이 공사감독까지 맡아하신 마님이 결국 참지 못 해 집을 나가셨다. 그 바람에 나도 마님 쫓아 파리에서 비행기 타고, 대서양 건너 만리 저편에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안티(Antilles) 열도(列島)로 날아가 프랑스령의 구아들루프(Guadeloupe) 섬에서 대서양 횡단(橫斷) 유람선(遊覽船)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탄 배는 오백 년 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러 떠나갔다가 스페인으로 돌아왔던 그 뱃길을 따라 스페인의 까디스(Cadiz)에 도착하기까지 2주일을 항해하고 어젯밤에 지브롤터(Gibraltar) 해협(海峽)을 통해 지중해(地中海)로 들어와 줄곧 스페인의 해안선(海岸線)을 따라서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항진(航進)하고 있는데 대서양을 횡단할 때 높이뛰기하며 앞서 달리던 거센 파도는 배 따라오기에 지쳐, 이제는 꽁무니에 매달려 하얀 거품만 일으키고 있다.
지난 2주일간 카라이브해(海)와 대서양을 항해하는 중에 배가 종종 항구에 정박(碇泊)할 때, 우리는 네델란드령 세인트마르틴(St. Martin) 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Virgin Islands)의 토르톨라(Tortola) 섬, 도미니카공화국의 싼또도밍고(Santo Domingo)와 라로마나(La Romana), 포르투갈령 마데이라(Madeira) 섬,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群島)의 떼네리페(Tenerife) 섬 그리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sia)의 까디스에서 하선(下船)하여 백사장으로 밀려 퍼지는 잔잔한 파도에 유유자적(悠悠自適) 발가락을 간질이기도 하고, 고적(古蹟)이 널린 옛 도시에 들어가 고서(古書)의 헤어진 낙장(落張) 들추듯이 허름한 유적(遺跡)의 깨진 돌 하나까지 두루 섭렵(涉獵)하기에 발이 부르트기도 했는데, 그러는 중에도 간간이 여객(旅客)을 노리는 장사꾼들과 흥정하여 염가 상품을 골라 샀다.
유람선이 세인트마르틴의 항구(港口)를 떠나 유럽을 향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에 도착하기까지는 꼬박 5일, 그 처음 하루는 갈매기가 가끔씩 가까이 날아와 배를 동반(同伴)했고 다음 이틀 동안에는 돌진하는 뱃머리에 놀라 도망치는 날치들이 수면(水面)을 차며 참새처럼 날아다녔다. 하지만 대양 항해 5일 중에 줄곧 수평선을 이어 큰 원을 둘러치며 세밀히 보아도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배는 한 척도 없었다. 게다가 고공(高空)에 비행기가 날아가며 그리는 줄 구름도 하나 보질 못했으니 하늘도 예외 없이 비어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를 떠가며 주변(周邊)에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문득 사람이 살지 않았던 중생대(中生代) 쥐라기(Jura紀)에 육지에서 모가지가 긴 공룡(恐龍)이 퉁퉁한 배를 질질 끌며 야자수같이 큰 고사리나물을 뜯어먹을 때나, 하늘을 나는 왕부리 익룡(翼龍)이 삼천장(三天丈)의 날개를 푸덕이며 잠자리비행기를 쪼아 먹을 적에나, 아니면 바다의 대가리 큰 왕고래가 잠수함(潛水艦) 같은 새우 껌 네댓 개를 한 입에 씹고 있던 그 순간마저도, 대서양은 비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골을 쳤다.
인간이 없었을 때의 지구는 거대한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고살았을망정, 지금 우리가 에너지 자원(資原)으로 쓰고 있는 화석연료가 무수히 살아서 지구를 덮고 있었다. 현대의 우주 과학자들은 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초대형 운석충돌(隕石衝突)과 기후 변화로 인하여 자연도태(自然淘汰) 된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그래도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따라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진화(進化)된 생물들은 이후에도 계속 번성(蕃盛)해서 지구를 푸르게 덮고 있었을 것인데, 기술로 무장(武裝)한 작은 인간들이 후대(後代)에 나타나 서로 모여서 올가미로 덮치고 꼬챙이로 찔러서, 선조(先祖) 동물님들을 마구 살육(殺戮)하여 금시(今時)에 대양이 소금물만 들어 찬 사막(沙漠)으로 변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가(歷史家)들은 중세(中世) 이후의 제왕(帝王)이나 항해가(航海家), 심지어는 해적(海賊)들의 열성(熱誠)으로 이루어진 지리상(地理上)의 발견으로 신천지(新天地)가 개척(開拓)되어 지구 전체가 발전한 것으로 해석(解釋)하지만, 그러한 발견과 개척으로 인하여 자연이 훼손(毁損)되어 미래의 동력자원이 지구상에 더 이상 축적(蓄積)되지 않는다면, 미래의 지구인들은 모두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구루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나무 심고' 지구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 개척이 결국은 '혹성탈출(惑星脫出)'을 자초한 원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수십 년 동안 전 국민이 산에 가서 나무 심기를 권장하기 위해 공휴일(公休日)로 잡혀있었던 4월 5일 식목일(植木日)이 이제는 비록 법정(法定) 공휴일에서 제외되었기는 하지만, '지구 뿅 - 지구를 떠나는 형벌'을 면하려면 휴가라도 내서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을까?
- 2014년 4월 3일,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라는 김민기(金珉基)의 노래에 적합한 답을 적어 보내면 '지구 뿅'을 면해주마!
프랑스령 구아들루프를 떠난 배가 카라이브해의 섬들을 맴돌다가 선회(旋回)하여 대서양을 횡단한 후, 지중해를 통해 프랑스 본토(本土)의 마르세이유 항(港)에 도착하기까지 선상에서 꼭 17일을 보냈다. 그중 처음 일주일은 카라이브해의 섬들을 유람했는데, 배가 기항지(寄港地)에 닿으면 하선하여 명소(名所)를 관람하거나 푸른 해변을 찾아가 물장난 치고 간간히 윈도쇼핑도 하며 배로 돌아와서 저녁 먹고, 다시 선내 대극장(大劇場)에서 곡예나 마술이 곁들여진 뮤지컬 쇼를 보았다.
배가 대서양으로 선수(船首)를 돌린 5일 동안은 선상에서 세 끼를 다 챙겨 먹고 갑판 수영장 근처에서 운동하고 책을 읽으며 쉬었는데, 날씨는 연일 쏟아지는 햇살에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하여 이따금씩 폐포(肺胞: 허파꽈리)가 부풀어 터질 만큼 깊은숨을 쉬어 가슴에 찌든 먼지를 후련하게 배출하였다.
배가 포르투갈령의 마데이라 섬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또다시 항구에 내려가 도시를 쏘다니며 명승고적을 답사하고 다른 기항지에서도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배가 항구에 들어가지 않고 항해만 하는 날에는 선상의 하루가 한가롭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한가함을 즐길 마음의 여유는 별로 없었다. 때로는 무(無)를 화두로 삼아 명상에 잠기는 선사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정신 건강에는 유익한 훈련이기 때문에 생각도 없이 가만히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을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실행하기 어려운 하나의 일이었다.
이렇듯 내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항시 마음이 불안하여 휴가 중에도 마음 놓고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일상의 구속이 몸에 배어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은 자연을 벗 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 넓고 당당한 기상)를 키웠는데, 우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첨예(尖銳)한 문명의 이기(利器)를 능숙하게 쓸 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 비하면 거의 알몸뿐이었던 선인(先人)들보다도 심기가 불안하여 의기소침(意氣銷沈)해 있다.
자연에서 정신의 폭을 넓히고 인성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해탈의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자연 자체가 우리를 유혹해서 품어 주어야 그 속에 파고 들어가 호연지기를 체득할 수 있으련만, 아깝게도 그런 자연은 빈자리에 건축물만 세워 놓기에 바쁜 우리들에 의해 파괴되어 주변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1930년대 제임스 힐튼이 소설에 비행기 사고로 히말라야 산맥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샹그리라라는 이상향(理想鄕)에서 경험한 얘기를 적었을 때에도 벌써 낙원은 도시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조선시대부터 알려진 한국의 이상향 청학동(淸鶴洞)도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히말라야도 인간들에게 정복당한 지금은 청학동도 관광객의 발길에 짓밟혀 처녀성을 잃은 지 오래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순결을 간직했던 처녀림도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 금세 오염돼 구린 내를 풍긴다.
우리가 쓰는 석탄 석유와 같이 지구에 축적된 화석연료의 근원은 수백 만 년에 걸쳐 광합성하는 식물을 키워 온 태양에너지이고, 계속 방사되어 오는 그 에너지를 모아서 두고두고 쓸 수 있는 방법은 화석연료의 재료인 나무를 많이 키워 땅에 비축하는 것이니, 나무 심고 자연을 가꾸는 일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최선의 투자가 아닐까?
2014년 4월에 대서양을 횡단하며 지구의 미래에 대해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