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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Mar 18. 2022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영화 [스펜서]리뷰

이 글은 영화 [스펜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물 교과서에 나오는 혈우병(Hemophilia)은 유전병들 중 가장 슬픈 병임과 동시에 왕가의 집념이 보이는 병이기도 하다. 혈통 보존이라는 미명 하에 왕실에서는 사촌 간에 결혼을 하거나, 정략결혼을 통해 권력을 더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 하나는(참고 1) 온 대륙의 왕자들이 피를 멈추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넘지 못할 것만 같던 두꺼운 담을 꾸역 꾸역 넘는다. 그리고 기어코 보통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웠던 크기만큼이나 쾌감을 주는 이야기로 떠돌게 된다.


21세기인 지금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왕족의 이야기는 이제는 대중 매체의 힘을 빌려 손쉽게 담을 넘는다. 가장 매력적이고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제목과 일치하는 자신의 성(Family name)인 [스펜서]로 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다이애나의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신비롭다. 영화 속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장면마다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의 슬픔이 묻어져 나오지만. 그녀의 고통과 용기도 함께 느껴져 마음이 몇 번이고 부서져 내리는 두 시간을 보내게 한 영화다.



윈저라는 이름의 왕관, 혹은 금고아;그것을 너무도 잘 표핸해낸 크리스틴 스튜어트
사진 출처:다음 영화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디라 했다. 그것도 영국 왕실의 왕관이라면.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꼿꼿하게 지탱하려 애쓸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스펜서의 모습은, 머리 위에 얹어진 원치 않는 왕관을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신의 차를 혼자 운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동시에 안절부절 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런 불안한 상태를 감출 수 없는 듯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손은 마음과 동기화되어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스펜서의 한 손은 언제나 다른 한 손에 의해 꾹 눌러진 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겨우 잠자코 숨을 죽인다. 두 손을 맞잡아야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그녀의 의기소침한 어깨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다이애나 머리 위의 반짝이는 것을 가리켜 왕관이라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그저 손오공의 머리를 옥죄이는데 쓰는 금고아(긴고아)에 불과했던 셈이다.


난생처음 보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이토록 잘 표현해낸 데는 틴에이지 영화배우라는 왕관을 쓰고 있는 줄 알았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개인의 울분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배우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모자랐기에.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금고아를 벗어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와 스펜서가 가진 공통된 욕망은,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뒤로하며 달리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다른 무수한 영화 속 장면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그 지점에서는 크리스틴과 스펜서 두 사람 사이의 구분선이 완벽히 사라진다.


두 여인은 자신을 통제하고 가둬두려던 그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왕관이라 부르며 칭송하던 것을 벗어던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달리기의 끝에 그녀들이 기어코 얻어낸 것에도 손뼉 쳐줄만하지만. 미친 듯이 달리느라 발을 다치지는 않았는지. 숨이 너무 차 기댈 곳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목걸이, 허수아비, 그리고 꿩;스펜서의 모든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진흙탕이라는 단어에서 딱 한 뼘 정도 모자라는 땅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


스펜서는 자신이 궁에서 속한 위치가 딱 허수아비 정도라고 생각했다. 남편 찰스는 바람까지 피운 주제에 불륜 상대에게 준 것과 같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고. 그것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내려놓으려 할수록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려한 장신구가 되어 스펜서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펄럭이면서, 아름다운 족쇄에 목을 맡긴 채 스펜서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리라 조금은 믿어버렸다.


하지만 스펜서는 자신의 두 아이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왕가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마음은 가볍게 묵살당한 꿩 사냥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꿩은 영화 속에서 아름답지만 도망갈 머리는 모자라는 짐승 정도로 그려진다. 확실한 이유 없이 희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스펜서는 자신의 모습과 꿩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의 꿩 사냥을 더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들의 총을 맞아 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고. 윈저 가문의 이유 없는 전통에 의해 스펜서가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 싶었을 테니까.


허수아비이자 꿩이었지만. 운명 같았던 진주 목걸이를 없애버린 스펜서는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신나게 도망을 친다. 벌판에 버려져 있던 그 허수아비에게는 스펜서의 옷이 아닌 윈저의 옷을 선물한 채로.


지금의 찰스를 보고 있자면. 다이애나의 저주(?)를 톡톡히 받고 있는 듯하다. 윈저 가문은 가장 매력적인 왕세자비를 영원히 잃었으며. 스펜서의 마음을 가지고 논 죄로 찰스는 왕위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이제 누가 정말로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는지. 그 당사자는 알겠지.




스펜서, 길을 찾다.;메리크리스마스, 스펜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 심판]의 김혜수 배우는. 판사들이 걸어가는 긴 복도가 그 사람들이 가진 끊임없는 일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대사들이 복도에서 이뤄지는 것도 판사들이 가야 할 길 중간에 있는 일들 같게 느껴져서 좋았다고.


영화 [스펜서]에서 복도, 혹은 길이 상징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펜서는 영화에서 늘 길을 잃고 헤맨다. 그것이 자신이 살던 동네 근처였건. 혹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한 미로 같은 궁궐이건 상관없이.


애처롭게도 스펜서는 그녀를 그 운명의 길고 긴 길 위에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해, 몇 년을 가도 낯선 길 위에 정처 없이 눈물을 흩뿌리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것을 토해내기 위한 화장실을 찾아서 겨우겨우.


그녀는 스스로를 죽여 이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기보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 길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덕분에 세 모자(母子)의 신나는 도망기(?)에서만큼은 스펜서는 망설이지도. 길을 잃지도 않는다. 그녀는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고. 주저하지 않고 엉망진창이지만 그대로 완벽한 채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궁과 멀어진다.


다 큰 어른이 되어버려 산타는 더 이상 그녀에게 내어줄 것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스펜서는 자신에게 아주 큰 선물을 준 셈이다. 두 아들에게도 빼놓지 않고.


스펜서는 영화 말미에 아이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패스트푸드를 먹이며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내겐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졸업]과 같아 보였다.


우리는 보통 [졸업]의 결말을 사랑하는 남자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도망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린 이 탈주극에 대한 대책 하나 없는 두 남녀의 소위 "현타"온 표정을 비추는 것이 영화의 "진짜"끝이다.


스펜서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밤이 되면. 잠든 두 아들을 보며 과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으로는 얼마나 버티며 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인지에 대한 숫자 놀음을 멈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펜서]는 졸업의 결말보다 약 5초 정도 앞에서 끊은 기분이다. 스펜서의 눈에 언뜻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비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홀가분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그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5초만이라도. 자신이 스스로에게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왔다.


어차피 우산이 없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빗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모든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기꺼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를 택했고. 한순간이었지만 스펜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든 시선을 받아야 했을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그 장면들에 묻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또 대단했다. 어차피 역사가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혹은 그녀의 마음이 십분 느껴지는 영화였기에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준 미래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조금 더 크고 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마저 남는 영화였다.


[좋아한 장면]

정말 무수하게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 날아와 꽂혔지만. 그중에서도 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체 사진을 찍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총거리며 걸어와 여왕 외에는 아무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가족들 사이에 섞여버리는 장면. 다이애나는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스펜서를 눌러 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영화 가득 그녀만의 색이 묻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스펜서를 지워내야 했다. 모르겠다. 그냥 이 영화 자체가 계속 눈물이 났다.





참고 1

혈우병은 남자가 걸리기 쉬움.(성 염색체 유전). 여자의 경우 혈우병에 걸릴 경우 embryonic lethal 한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음. 그 당시 왕자들은 말 타다가 넘어져서 멍이 든 게(내출혈) 아물지 않아 죽었다고도 하고. 처형 당했는데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내렸다고도 하고,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도 함. 아 물론 후자의 경우는 파상풍일 가능성이 더 높음.



[이 글의 TMI]

1. 코로나 격리가 끝나고 회사 갔지만. 여전히 회사는 싫군요.

2. 컨디션은 평소의 70% 정도밖에 안됨.

3. 입맛 없는 게 제일 힘듦.

4. 약 먹어야 되니까 꾸역꾸역 먹고 다시 빠졌던 3Kg 회복함(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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