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리뷰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보다 복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복수의 세계는 때론 잔혹했지만 아름다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고. 눈을 가리면서도 쉬쉬하며 들여다본 복수들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이제 복수를 버리는 카드 마냥 내려놓은 그가 야심 차게 다음 "믿을 구석"으로 집어 든 카드는 사랑인 듯하다. 복수가 끝나고 낫지 않을 것만 같은 상처들만 가득한 마음을 이제야라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뭉툭한 막대기로 마음껏 긁어놓은 모래사장의 흉터도 모조리 끌어안는 바다처럼. 조용하고도 깊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가 늘 그랬듯 모질고 지독한 면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사랑이 없다. 혹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사실 사랑이란 테마는 언제나 그와 함께였다.
사랑해야. 미워할 힘도 얻는 법이니까 말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사랑의 단절;언어와 사랑을 둘 다 배워가는 두 사람.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을 시어머니로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마블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닉 퓨리를 지고지순한 효자로 만들어버린 엔드게임의 한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기념비(?) 적인 사건이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건임과 동시에. 번역(혹은 통역) 실력이 단어의 뜻만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의역, 혹은 맥락에 있어서도 통달해야 함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 정확히 마음에 와닿게 해야 하는 것. 거기에 승패가 달린 셈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서래와 해준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으로 선택한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덕분에 두 사람은 영화 내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해 답답해하고. 왜 이 말을 지금 자신에게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마음을 심장으로밖에 번역할 수 없는 앱 하나에 겨우 의존해 자신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전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비언어적 표현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랑임을 말하고 있지만. 온전하고 정확하게 "그 단어"를 내뱉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원망도. 또는 거기까지 해석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지만 이미 몇 번이고 과대 해석과 오역을 끝낸 채 자신에 대한 마음을 멋대로 키워놓은 상대방의 눈을 봐야 하는 고통도.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완벽하게 메울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언어적 장벽에 빗댄 설정은 최선의 방법임과 동시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래의 노래는 세이렌의 목소리를 닮았다;붕괴의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세이렌의 노래
서래와 해준의 관계는 세이렌의 신화가 진행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서래는 자신에게 살인자 판결을 받게 하고도 남을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해준을 온몸으로 유혹했다. 나의 바다에 어서 빠지라고 손짓하는 서래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기꺼이 홀린 채. 해준은 붕괴의 바닷속으로 스스로 풍덩.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몸을 던졌다.
이미 한 번 죽어버린 해준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었고. 자신의 목숨 값으로 서래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했지만. 서래의 노래와 서래는. 마치 이포의 안개처럼 없어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해준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서래는 이제 두 번째 해준을 상대해야 했다.(참고 1) 이번만큼은 너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겠노라는 의지와. 그때처럼 자신을 확신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눈빛을 가진 해준 앞에서. 먼저 흔들렸던 것은 아마도 서래였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두 사람이 이포를 배경으로 벌이는 마지막 혈전(?)은 서래와 해준이 벼르고 별러 온 13개월 만큼이나 치열하고 가슴 아프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마음속에 생채기를 내려는 말들은 아프고 날이 서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 이 서걱서걱 썰려 나가는 것 같기만 하다.
결국 서래는 마지막 전투(?)에서 진 죗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이포에 바쳐야 했다. 마치 해준이 한 번 빠졌던 붕괴의 바다처럼 유난히 차갑고 거친 이포의 바다에서. 서래가 최후의 순간에 읊조린 노래는 세이렌의 빛바랜 마지막 절규처럼 느껴졌다.
결심의 순간과 만조가 맞아떨어지는 마지막 5분;모든 것을 뒤집는데 필요한 시간 단 5분
서래와 해준은 각각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한 과정들을 겪는다.
무언가를 결심하기까지의 고민. 또는 결심을 미루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와 답보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영화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드라마틱 해 보이지 않고. 약하다 못해 자신들의 결심이 무엇인지도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영화 전반부의 그들은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휘청거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연민을 벗어나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 들은 쉽사리 결심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약한 의지들이 기어코 쌓여 이미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두 사람의 결심도, 그리고 결말을 담은 만조도 가까워졌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결심과 만조의 순간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이 바닷물을 받아 들여야 할지. 혹은 지금이라도 살려달라며 소리를 쳐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만조 때의 바다는 다짐 전의 모든 것을 수면 아래로 휩쓸어 버리고는 시치미를 뗀다.
결심이란 것이 그렇게 크고 단호한 것이며. 두 번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5분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허파마저도 물에 잠기는 것 같은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면서
영화의 중간중간은 사실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늘어진다는 생각을 벗어나 영화가 “길다”라는 생각에 다다르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마지막 5분을 보고 나면. 이 모든 과정이 왜 반드시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최후의 5분을 보며. 정말로 말 그대로 숨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영화의 앞부분들이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리멸렬해 보이던 모든 모습은 사실 매 순간 사랑한다고 외치는 두 남녀의 모습이었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위해 발톱을 세운 것이 아닌. 내가 여태 얼마나 아팠는지를 알아달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토록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영화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7월에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참고 1
세이렌에 관한 일화가 많긴 한데.
어떤 곳에서는 밀랍으로 귀를 막은 부하들과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은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반응하지 않고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세이렌보다도 훨씬 멋진 노래를 불러버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설이던 간에. 자신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세이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오디세우스의 설화를 더 좋아함.
[이 글의 TMI]
1. 한 달 내내 잇몸치료받은 6월.
2.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2킬로가 빠져버림.
3. 그런데 사랑니도 하나 남은 게 올라오기 시작함.
4. 지옥의 6월이 되어버림.ㅠ
5. 다들 더운데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랄 뿐입니다.
카카오뷰도 있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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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로 감싸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