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이 세 개라면?

by 안승준

진도가 급하지 않은 수업 시간엔 학생들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편이다. 좀 더 어려운 수학 문제 몇 개 정도 푸는 것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것은 그보다 몇 배나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먹어보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음식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시각장애인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장애라는 공통분모 가진 아이들은 내 이야기가 시작되면 깊은 공감을 보내고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우리는 또 다른 다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보고 싶었다.


“밸런스 게임! 두 가지 중 하나만 고른다면 어떤 것을 고를래? 첫 번째는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눈이 잘 보이기는 하는데 눈이 세 개인 삶을 사는 거야!”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에 아이들은 웅성거렸고 서로의 주장을 나누기도 했다.


“보이게 되면 무조건 좋은 것 아냐?”


“안 보여도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얼굴 한가운데 다른 눈이 붙어있는 이상한 모양으로 살 필요는 없잖아.”


“선생님! 눈 하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붙어 있어도 되나요? 예를 들면 등이나 엉덩이 뭐 이런 곳에요.”


“에이! 그러면 땀나고 답답하고 더 이상할 것 같은데!”


“그럼 수술해서 눈 하나를 없애도 되나요?“


질문에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아이들은 서로 생각하고 대답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눠가던 아이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의 아이가 선택한 것은 보이지 않는 현재의 삶이었다. 다른 학급에서 던진 같은 질문에는 학급원 전부 현재의 삶을 택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있어 눈 하나가 더 있는 다름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셔요?”라는 어느 녀석의 질문에 나 또한 건강한 눈 세 개의 삶을 단번에 고르기는 어려웠다. 앞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는 것은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흥분되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내 모습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실용적으로 따진다면 얼굴에 눈 두 개와 뒤통수에 하나 정도가 더 있으면 굉장히 편리하겠지만 그런 나를 바라볼 보통 사람들의 시선은 따갑고 아플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게 보거나 불쌍하게 보는 것도 불편하겠지만, 궁금해 하거나 신기하게 보거나 부러워하는 시선도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겪어 보지 못한 다름의 상황보다는 보이지 않는 현재 상황을 택했다.


만약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과 큰 날개가 생기는 삶 중에서 어느 쪽을 고를 것인지를 묻는다면 어떨까? ‘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면!’을 기분 좋게 상상하는 이도 있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달라지는 모습과 그 삶에 대한 불안함으로 인해 결국 현재의 모습을 택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주인공의 고뇌도 남들과 다른 자기 모습에서 연유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름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내가 가장 불편한 것도 남들과 다른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지만 여러 번 고백하건대 나 또한 내가 익숙하게 겪어보지 못한 다른 이들의 다름에 대해 그다지 큰 포용력을 가지지 못한다.


잘 만날 수 없는 어느 아프리카 부족의 독특한 삶 정도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나와 다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나의 공감 능력이나 포용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 멀쩡한 눈 세 개를 준다고 해도 고민하는 내게 나의 장애를 다른 장애로 바꿔준다고 하면 나의 대답이 어떨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것은 내가 가진 현실보다 달라질 모습이 객관적으로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에 대해서 갖는 나의 생각들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잘 보이는 눈 세 개를 가지는 것, 혹은 없던 날개가 생기는 것은 지금의 내가 가진 삶보다 편리해질 것이 확실하다. 난 책을 볼 수도 있고 먼 곳을 훨훨 날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다름에 대해 갖는 근거 없는 불편함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해도 사실은 깊은 고민이나 객관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름에 대한 막연한 이질감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느끼는 다른 이들의 시선도 그렇지만 나와 내 제자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낯섦에 대한 감정도 그렇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훌쩍 넘어가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장애 없던 내가 생각하던 시각장애인의 삶은 실제 시각장애인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고 무엇보다 늘 우울하지도 않다. 어쩌면 눈 세 개 달린 삶이나 날개 있는 삶도 얼마간 지내다 보면 익숙해지고 편리해질 수도 있다. 언젠가 그 삶이 익숙해지면 난 또 그 전의 삶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넘어 다름을 공감하고 포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세 개의 눈이 생긴다면 나는 어떨까?‘


‘날개나 초능력이 생긴다면 또 어떨까?‘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 조금 더 깊은 성찰을 하다 보면 다름을 보는 건강한 시선이 생기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