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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Sep 19. 2020

벌써 아빠가 된 지 1년이라니

단이 첫 생일을 맞아

지난주 단이 생일을 맞아서 한 주 휴가를 썼다. 코로나 시대에 어디 여행도 못 가고 쌓여만 가는 휴가를 보니, 필요할 때 몰아서 써야겠다 싶어서 썼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침 회사가 전 직원에게 10일간의 추가 유급 휴가를 지급했고, 덕분에 연말 휴가를 당겨 쓰지 않고도 편한 마음으로 쉴 수 있었다.


단이 생일 주간은 환상적이었다. 호텔에 하루 묵으며 단이와 수영도 즐겼고, 단이 태어나기 전 부인님과 함께 만삭 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가족사진도 찍었다. 단이를 데리고 맛있는 곳으로 음식도 먹으러 다녔고, 단 둘이서 새를 같이 보러 공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행복한 싱가폴에서의 출산과 육아


예전에도 한 번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그 아이에게 내가 남길 영향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하지만 싱가폴에서 살면서 이곳에서라면 아이를 키워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전히 굉장히 만족하면서 단이를 키워나가고 있다. 한국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놀라는 이곳의 육아 경험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축복받는 임신 과정


싱가폴에서 아내가 임신을 하고 가장 놀라웠던 점 하나를 뽑으라면, 바로 바다를 가르듯 갈라지는 싱가폴 지하철의 인파를 들겠다. 싱가폴 지하철에는 인원이 많은 출퇴근 시간에 안내를 하는 직원들이 항상 배치되어 있다. 이 직원들이 임산부를 보면 잽싸게 손을 이끌어서, 제일 먼저 태우고, 앉아있는 사람에게 임산부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라고 한다. 당연히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도 불만이 없다. 이 기적 같은 경험을 한 번 해보고 나면, 임신이 정말 축복이라는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한국처럼, 말로만 임신이 대단한 일이라고 말하고 임산부가 처하는 현실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임신이 정말 엄청난 일임을 실제로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또 하나 싱가폴에서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감사했던 점은, 싱가폴에서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 관해서 부부에게 선택을 맡기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한국은 임산부가 먹어야 하는 음식, 운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출산 방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말들이 너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걸 굳이 임산부에게 '충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있다. 그런데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적당히 제한된 정보보다 못할 때가 많다. 많은 정보는 사람들을 질리고 겁먹게 한다.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하고 산부인과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해준 "임신은 병이 아닙니다. 날 것을 먹는 것 빼고는 지금 하던 것 그대로 다 하셔도 됩니다."라는 이야기는 이곳이 임신과 출산을 얼마나 다르게 대하는 지 잘 보여줬다.


아이에 친절한 사람들


이런 분위기는 임신 기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싱가폴에는 "한식당을 제외하고"는, 어느 식당이든 있는 아기용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식당을 예약할 때 아기를 데려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당연히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식당의 종업원들도 아기를 데려가면 아기랑 놀아주려고 정신이 없다. 서비스 정신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이 사람들에게 아기는 너무 귀엽고 소중한 존재고, 그런 존재에 대한 애정과 배려는 당연한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


싱가폴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아기들에게 정말 친절하다. 단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유치원을 몇 군데 구경 다닌 적이 있다. 같이 구경을 돌던 그룹에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혼자서 2살 정도 된 아이를 데리고 온 한 한국 여성 분이 있었다. 아이는 유치원 구석구석에 재미있는 것들을 놀고 싶어 했고, 같은 그룹에 있던 부모들도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막 싱가폴로 오셨다던 그분은, 아이가 계속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자 연신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에게 아이가 소란스럽고, 떼를 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왜 그걸 사과하는지 의아해했다.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이를 다그치는 그 한국 분을 보고, 참지 못한 한 사람은 "아이가 다 그렇지 왜 다그치냐"며 한 소리를 했다.


우리는 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였는가


결혼 후 한국에서 상해, 발리, 싱가폴까지 많은 나라로 옮겨가면서 살았다. 그 매번의 이동 속에서 우리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내년에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족계획을 할 수가 있을까.


싱가폴에서 얻은 정신적, 경제적 안정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건 싱가폴에서 1년 정도 지내고 난 이후부터였다. 일단 싱가폴에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정시 퇴근이 일반적이다. 야근이 당연한 한국에서 살다가 외국에서 일을 해보니, 일이란 야근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퇴근 후의 삶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여유는 우리 부부가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싱가폴의 경우 신입은 한국과 연봉이 비슷하지만, 경력직의 경우에는 이직 시 높은 연봉 상승률 덕분에 한국에 비해 연봉 수준이 높은 편이다. 물가도 물론 높지만, 그걸 상회하는 연봉을 받을 수 있고, 우리 부부의 경우 두 사람 모두 일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던 그 시기가 참 무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상주 도우미 제도가 활성화되어있어서, 아기를 보는 부담이 전적으로 부부에게 전담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다는 것도 육아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은 아기를 대하는 문화


결정적으로는 싱가폴 사회가 아이, 임신 그리고 육아를 대하는 태도를 빼놓을 수 없겠다.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매니저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매니저의 첫마디는 "지금부터는 언제든지 재택근무를 하거나, 휴가를 써도 좋아. 가족이 제일 중요하니까 아내를 최대한 챙겨줘."였다. 이런 문화가 우리가 아이를 낳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 여기서 아이를 낳으면, 아기가 최소한 어리고 나약하고, 불평불만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움받지는 않겠구나.'


어떻게 단이를 키울 것인가


단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까


싱가폴에서는 18개월부터 유치원을 보낼 수 있다. 물론 2~3개월 이후의 영유아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상주 도우미가 집에 있어서 보통은 18개월부터 유치원을 보내거나 만 4살 정도가 되면 보내기 시작한다. 상주 도우미 분이 계시기 때문에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유치원을 보내야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또래 속에서 정말 빨리 배운다. 단이는 신체 성장과 여러 발달 속도가 빠른 편이었는데, 박수를 쳐야 하는 시기가 한참 지나서도 치지 않았다. 그러다 박수 잘 치는 친구와 며칠 놀았더니 금방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사람은 사회 속에서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가능하면 일찍 유치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싱가폴은 영주권자가 아닌 외국인의 싱가폴 로컬 학교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 국제학교를 보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고, 영주권이 나온다면 로컬 학교로 보내는 것도 함께 고려하고 있다. 어릴 때의 선택 하나가, 한 생명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끼게 되면서 더 조심스럽다.


너는 미움을 모르며 자랐으면 좋겠다


싱가폴에서 단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처럼, 나는 단이가 그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곳에서 자라길 원한다. 아기가 시끄럽다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인상을 찡그리거나, 노키즈 존으로 출입을 거부당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아이들을 이해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니, 자연스레 아이들의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밖에 나와서 특별히 이상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은 훨씬 적다. 식당에 들어가면 꼭 아이들 한 둘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도 그렇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탁 옆에서 높은 아기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20년 뒤에 단이가 아빠를 떠올릴 때


나는 내가 그리 특별한 아빠로 기억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를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떠올릴 때, 많은 순간 옆에 있어줬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삶에 아빠가 필요했던 많은 순간에 항상 옆에 있었던 아빠로 기억될 수 있다면, 나의 20년 뒤는 너무 행복할 거 같다.


단이를 낳기 전에는 성공하겠다며 열심히 살아왔다.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인생을 함께 걷는다고 생각해 본 적도 딱히 없다. 그런데 단이가 태어나고, 1년을 함께 해보니 나만 빛나는 것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것을 돕고 지켜보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서 하나하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내가 더 큰 세상을 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단이와 함께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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