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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여행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행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by 임영신




우리의 뇌에는 시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영역이 있는 것 같다.

그 영역은 우리를 매혹 시킨 것, 우리를 감동시킨 것, 우리 삶에 아름다움을 새긴 것들을 저장한다"

- 밀란 쿤데라



20230817_100012.jpg Photo by이늘봄



그해, 모든 것이 변했다.


인도 펀잡지방의 도시 잘란다르는 인구 100만 규모의 작은 도시다. 그 곳에 30년째 살아가는 토박이 안슐 초프라(Anshul Chopra)는 어느날 무심히 자기 집 옥상에 올라갔다가 경이로운 광경을 마주친다. 30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히말라야 산맥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 12일 만의 일이었다. 펜데믹으로 사람들의 이동이 멈추어 서자,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의 능선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는 경이를 마주한 자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히말라야산맥은 그동안 계속 오염으로 가득 찬 하늘 뒤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을 기록한 안슐의 사진은 트위터를 통해 퍼져나갔고, 다큐멘터리로 연결되었다. 사파리 차량으로 가득하던 초원에서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들이 칼날처럼 귀를 찔러 괴로워하던 표범들이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자 고요 속에 삶과 야생성을 회복해 가는 모습, 바다와 강이 맑아지며 되 살아나는 모습, 항공기와 자동차의 매연으로 그득하던 하늘이 맑아지며 나타나는 풍경들... 애플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그해 모든것이 변했다'는 인간이 멈추어 서자 지구가 어떻게 스스로를 어떻게 회복해가는지 경이로운 과정을 지구의 시선으로 소중히 기록해 주었다.

- 애플TV 다큐멘터리, '그해 모든것이 변했다' 중에서


지구가 고온에 시달리며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멈추어 서게 한 전대미문의 펜데믹, 코로나는 이제 어느새 지나간 시절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 어떤 이름으로 펜데믹이 다시 올지는 모른다는 불안한 예견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코로나 덕분에 세계는 자신의 집 옥상에서 히말라야를 마주친 안슐씨처럼, 우리 역시 이 재난을 불러온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기후위기는 미래세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전에 닥친 일이라는 것을 선명히 마주했다.

기후위기 시대,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에 기반한 인간의 활동이 지구를 얼마나 뜨겁게 달구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지구온난화 그래프는 이제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석유화학 연료에 기반해 밤낮없이 돌아가는 공장처럼 지구를 착취하며 혹사해 온 과잉생산, 과잉소비, 과잉폐기 시스템은 한계에 다다랐음을 말하는 여러 징후들은 도처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멈추고, 학교와 회사를 가지 못하게 하고, 결혼식과 장례식 마처 멈추게 하는 현실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한 '거대한 멈춤'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기후위기가 우리의 일상이 연결된 일이었다는 것을 감각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게 된 셈이다.


돌아보면 코로나를 불러온 것은 박쥐도, 지구 온난화도 아닌 우리의 모순적 삶 때문이었다. 건강을 위해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며, 유기농과 친환경먹거리를 찾으면서도 지구는 마치 생명있는 존재가 아니라 쓰고 버려도 되는 일회용 물건인양 다루어 왔다. 이윤을 위해 자원을 끝도 없이 추출하고, 오직 인간의 이익과 편의만을 고려해 지구를 쓰고 버려도 되는 물건처럼 사용해 우리들의 삶의 방식에 신음하던 지구는 생명의 힘을 다해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고있는 것이다. 멈추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활동을 멈추고 멸종을 향해 가고 있는 지구의 이정표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 지구전체가 정지한 듯 펜데믹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코로나의 시간이 끝나자 마자 사람들은 마치 얼음땡 게임에서 풀려난 술래마냥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복귀해 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후위기의 징후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섯번째 대멸종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이야 말로 지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호흡으로 출발점과 도착점을 살펴보며 경로를 재탐색해야 하는 전환의 시간, 어쩌면 기후위기에서 벗어나 멸종의 시계를 멈추고 지구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여행하는 세계, 더워지는 지구

이동성의 증가, 여행플랫폼의 발달, 챗 지피티 등 인공지능의 등장은 개인의 취향을 따라 세상의 어디로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연결의 세계를 촘촘하게 직조해가고 있다. 에어비앤비, 부킹닷컴, 스카이스캐너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등장하며 누구나 클릭 몇 번이면 낯선 도시로 날아갈 수 있는 여행의 시대에 우리를 도착해 있다. 손 끝으로 지구 반대편의 골목길을, 내가 묵을 공간과 동네를, 가고 싶은 카페와 식당의 메뉴판과 별점, 리뷰를 살펴보며 가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것들을 결정한다. 더 이상 낯선 길을 헤매거나 거리에서 누군가를 붙들고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유튜브에는 실시간 여행 정보가 넘쳐나고, 구글맵은 골목과 거리, 찾아갈 식당의 메뉴와 공간, 영업 시간까지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며 세계룰 더욱 투명하고 촘촘하게 연결해 나간다. 컨택리스 트래블 카드가 출시되며 이제 환전조차 필요 없어졌다. 여행은 이제 그저 떠나기로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휴대폰과 카드 한 장만 있다면 오늘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먹고 내일 런던에 가서 책을 사고, 다시 파리에서 저녁을 먹는 삶이 충분히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기후위기의 뉴스들과 펜데믹의 기억들은 여행 가방을 꾸릴 때마다 어딘가 마음 한 켠을 묵근하게 한다. “지금 이대로 여행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 질문을 선뜻 덜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코로나를 투과하며 조밀해진 나의 일상과 지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 켠, 그 질문을 내려놓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이다.

쏟아져 나오는 기후위기의 수많은 뉴스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지구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기후온난화를 너머 기후 열대화를 향해 가는 지속불가능한 지구 위에서, 지속가능한 여행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일년 내내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를 쓰고 무포장을 실천해도 장거리 비행기 한 번이면 연간 1인당 탄소배출량을 훌쩍 넘어서는 온실가스를 지구 위에 남기게 된다. 도착한 곳에서는 현지인 보다 20-30배의 물과 전기를 사용하고, 머문 곳에는 하루 평균 3.5킬로의 쓰레기를 남기는 여행을 하며 우리는 동시에 '기후위기'를 염려하며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려 애쓰는 모순적 존재다. '죽고싶지만 떡복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처럼 '기후위기는 걱정되지만 여행은 계속 하고 싶어'라는 딜레마를 품고 쯤 눈감은 채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행을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지구를 부탁해’의 저자 데이브 부클리스는 우리가 기후위기로 죽어가는 지구를 지키길 원한다면 쓰레기 문제와 에너지 문제로 훈계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과 함께 '지구를 아름다움을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나아가자고 청한다. 일상에서는 무심코 마주하는 노을을 저무는 바닷가에 서서 누군가와 함께 장엄하게 마주할 때, 짙푸른 어둠 속에서 쏟아질 듯한 은하수를 함께 바라볼 때, 고요히 깊은 강이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고원에 깃든 태초의 고요를 마주할 때 인간과 우주 사이의 경계가 얇고 투명해지는 얇은 곳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준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선 지구와 인간의 연결을 조망하는 시선과 감각은 인간과 신적 영역의 경계가 옅어지는 ‘얇은 곳’에 다다를 때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지구와 연결된 감각을 회복하고, 지구를 지키는 행동을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그 ‘얇은 곳’을 함께 경험할 ‘얕은 곳’으로 나아라고 권한다. 어쩌면 여행은 우리를 그 '얇은 곳'으로 데려다 주는 가장 '얕은 곳'일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그 얕은 곳에서 마주한 시적 기억들을 조정할 특별한 공간이 우리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뇌에는 시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영역이 있는 것 같다. 그 영역은 우리를 매혹 시킨 것, 우리를 감동시킨 것, 우리 삶에 아름다움을 새긴 것들을 저장한다"고


여행, 삶에 아름다움을 새기는 시간

새만금을 지키는 사람들의 절망과 기다림을 담은 영화 '수라'. 그토록 오랜 시간, 이미 매립이 되어 버린 새만금이 다시 순환되기를 요구하며 탐조 활동과 시위, 청원과 행진..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나가고 있는 한 환경운동가에게 다큐멘터리 감독은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오랜 시간 갯벌을 위해 싸우게 하느냐고... 영화 속 주인공은 아스라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창 갯벌에 어느 날 탐조를 왔는데 멀리서 날아오는 새들의 군무를 보았어. 수만 마리의 새떼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아름다운 비행으로 저녁 하늘을 수놓는데 그 빛과 소리에 압도되어서 다른 세상이 열린 것만 같았어. 어쩌면 그 때 그 아름다움을 본 죄 때문 아닐까”

아름다움을 본 사람에게는 그것을 지켜야 할 책임이 따른다는 그의 말은 오래도록 마음 한켠에 머물렀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갯벌 위로 새들이 내려앉는 군무를 본 그의 '시적 기억'은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모두가 포기한 갯벌의 회복을 위해 싸우고, 새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린 희망의 근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에서 저마다 마주했던 아름다운 순간들, 자연에 대한 경탄의 기억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지구의 고통을 공감하며, 공존의 길을 찾아갈 희망의 근거가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여행, 연결과 연대의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 대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장소감’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공간이 자기에게 친숙한 곳이 될 때, 다시 말하면 한 번 와 보고, 두 번 와 보고, 세 번 와 보고, 경험이 쌓여 가면서 추상적인 공간은 친밀하고 의미가 가득한 장소로 바뀌어 간다. 모든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장소를 대하게 되는데 이것을 장소감이라고 하고, 장소감은 반드시 장소애를 낳는다." (이푸 투안,공간과 장소)

삶의 한 시절을 깃들었던 마을과 골목, 숲과 바다를 기억할 때면 그곳에 여전히 내 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감각이 ‘장소감’이라는 것이다. 그 연결의 감각은 그 공간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과 관계를 통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지리학자 랠프는 그런 소중한 장소가 과도한 개발로 혹은 재난으로 변형되거나 사라질 때 사람들은 '장소상실'을 경험한다고 갈파했다. 내 삶에 연결된 한 장소가 사라지는 것, 그곳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변형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내안의 무엇인가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장소가 내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 또한 말한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 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리스본행 야간열차)고..



여행, 누군가의 장소에 도착하는 일

여행도 삶도, 장소 위에서 일이다. 우리가 여행한다는 것은 어딘가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무인도가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삶의 장소, 마을과 골목이다. 그곳에 머물렀던 나의 시간이 그곳을 내게 소중한 곳으로 만드는 연결의 감각을 건네어 준다면, 여행은 우리가 지구와 더 넓고 깊게 연결되는 존재의 방식이다. 제주의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가 파괴되어 갈 때, 월정리 아름다운 바닷가가 온갖 상업 공간으로 뒤덮여 갈 때, 쉼과 휴식을 얻었던 발리의 해변이 쓰레기로 가득해 걸을 수조차 없이 변해가는 것을 볼 때, 그곳을 사랑했던 여행자들은 상실을 너머 때로 분노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 '장소감'만으로 그곳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것을 지켜낼 수 없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일, 파괴에 맞선다는 것은 그 장소와 연결된 사회적 기억과 집합적 연결, 즉 ‘사회적 장소감’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라의 환경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초대해 갯벌로 나아가는 탐조여행을 지속하는 것도,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을 개발로 부터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주말마다 여행을 조직하고 캠핑을 하며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세월호 학생들이 다녔던 안산 단언고와 기억의 장소를 찾아가는 일도..그곳에 가지 않으면 공유할 수 없는 기억을 장소를 통해 경험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공유하기 위한 연결의 여정인 것이다. 즉 여행은 그저 구경하고 스쳐지나가는 체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의 마주침 속에서 연결이 일어나고, 그 만남과 경험을 통해 기억을 공유하는 '기억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인 것이다. 여행자들의 기억은 연결과 연대를 통해 우리 사회 어딘가에 '사회적 기억' 으로 저장되며 그 장소는 우리에게 '사회적 장소감'을 선물해 준다.

순록의 들판과 오로라가 내리는 설원에 깃드는 여행을 한 사람은 광산개발로 인해 순록의 터전과 원주민들의 마을이 사라져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히말라야의 새벽 빛이 빙벽에 번지는 것을 보며 생의 경탄을 쏟아냈던 사람은 히말라야의 빙하가 소멸해 가는 것을 그저 관망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바다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쏟아내었던 사람은 산호의 90%가 죽어가는 바다의 죽음을 그저 바라볼 수 만은 없다. 제주의 유채를, 오름을, 바다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개발과 관광으로 곳자왈 숲이 사라지고 마을이 무너지고 바다가 오염되는 것을 외면하고 그저 다른 바다를 찾아 떠나지는 것으로 제주를 지우거나 잊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가 어딘가에 깃드는 일은 그곳을 나의 일부로 공유하는 일이며, 그곳에 나의 일부를 두고 오는 일이다. 기후위기 시대,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나선 우리의 여행은 결국 그 아름다운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시대의 끝자리에서 그것을 마주한 이들이 져야할 '기억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세상의 장소들에 대한 '시적 기억'을 켜켜히 쌓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려진 새로운 여행의 지도는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을 외면하지 않는 연대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로 다른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전환의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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