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교토 둘째 날 : 니조 성에 바람 맞고 닌나지로
교토의 교통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믿고 쓸 수 있는 도보, 세상 간편한 택시, 그리고 전철과 버스. 돈 걱정 없는 여행자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게 제일 좋지만 무지막지한 택시비용은 감수해야 한다. 전철만으로는 여행지를 모두 커버하기는 어려운 상황. 서쪽의 아라시야마, 또는 남쪽의 후시이미나리 쪽을 갈 일이 아니라면 전 지역을 촘촘하게 커버하고 있는 시영버스가 최선의 선택이다.
버스패스(1인 600엔)을 사면 시영버스라면 노선 상관 없이 표 하나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일일히 동전을 찾아서 내는 것도 힘든 일일 뿐더러, 하루에 3회만 이용하면 이득이다(기본요금 260엔). 대부분 하루에 3회 이상 버스를 이용하게 되니, 버스패스는 교토 여행자에게 필수 요소다. 버스는 뒷문으로 탑승해서 앞문으로 하차할 때 요금을 낸다. 그 때 버스 기사에게 버스 패스를 요구하면(간단하게, “버스 패스 구다사이”와 장수를 손짓하면 소통할 수 있다) 값을 지불하고 살 수 있다. 처음에 기계에 넣으면 날짜가 찍혀서 나오는데 이후에는 표를 기사에게 보여주고 내리면 되니 간편하다.
첫째 날은 도보로 반경 2키로 이내의 여행지를 주파했다. 오늘은 버스 패스를 이용해서 조금은 멀리 나가는 날이다. 버스를 타러 야사카 신사 앞으로 왔다. 이제 겨우 이틀 째지만 오고 가고 자주 보니 계단 위 저 붉은 빛 문이 왠지 친근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버스가 왔다.
교토는 중앙에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 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다. 동남쪽으로는 사찰과 낮은 건물이 주를 이룬다. 강 너머로 교토 역이나 가와라마치 쪽은 높은 건물과 넓은 도로가 꽤나 많다. 특히 시조가와라마치 역 인근의 아케이드는 명품샵 등이 입점해 있어서 우리가 상상하는 교토와는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강을 건너고 번화가를 지나 버스는 가고 서고를 약 15분 정도 반복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니조 성.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교토로 상경했을 때를 위해 니조 성응 만들었다. 교토 어소 옆에 만들어 천황의 근저거리에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 이곳에 성터를 잡았다. 니조 성의 천수각은 여느 일본 고성들처럼 여러 재해를 이겨내지 못했다. 지금은 몇몇 어전과 천수각 터만 남아있다. 화려하고 우아한 니노마루와 혼마루 어전은 다소 휑할 수 있는 유적지를 그들의 아우라로 채운다. 이미 전에 한 번 와보간 했지만 동행이 처음이라 또 다시 온 니조 성.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도착해서 티켓을 사려는데, 니노마루 어전이 오늘 하루 폐쇄됐다는 비보를 접했다. 가뜩이나 건물이 많이 남지 않은 니조 성에 니노마루 어전을 들어갈 수 없다니. 큰 낭패였다. 내일은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그렇다더라. 잠깐의 고민이 이어졌다. 에이, 그냥 여기는 제끼자. 어차피 나는 한 번 들어가보기도 했고. 동행에게는 5년 전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다시 버스를 탔다.
5년 전 겨울에 찾았던 니조 성
20여분 다시 더 서쪽으로. 누구 하나 알려주지도 않았건만, 이미 시각적으로 시외각이었다. 빽빽하던 건물이 듬성듬성해지고, 낮은 가옥이 줄 지었다. 졸졸 흐르는 하천 옆의 오래된 집의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소도시었다. 멀리서나 보이던 서쪽 산맥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렇게 언제쯤 도착하나 싶을 때쯤, 닌나지(인화사) 앞에서 내렸다.
닌나지의 정문인 이왕문(니오몬). 치오인의 산몬, 난젠지의 산몬과 함께 교토 3대 대문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고. 다만 히가시 혼간지의 고에이도몬을 3대문으로 일컫는 이가 더 많다고 한다.
예로부터 천황은 상징적 존재였다. 제 힘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미약한 인물로 그려지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역대 모든 천황들이 모두 무력했을까.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은 실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이를 ‘법황’이라고 한다. 닌나지는 은퇴하여 법황이 된 우다천황이 창건했더. 이후로도 닌나지의 주지는 모두 황족이 맡았고, 888년에 시작하여 도쿄 천도 이전까지 전통이 이어진다.
고난이 없지 않았다. 오닌의 난이라는 불운은 황실 사찰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전화에 파괴된 닌나지는 에도 막부 초기에 교토 재건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복구됐다. 황실 사찰이었던 닌나지의 복원은 교토 어소(고쇼, 천황의 거처)의 재건축과 함께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어소에 있던 다양한 황실 건물이 닌나지로 이축됐다. 닌나지가 황실사찰로서 다른 사찰과 다른 모습을 띠는 큰 이유다.
버스에서 내리면 큰 정문이 방문객을 반긴다. 사찰을 지키는 두 천왕의 문이라 하여 이름이 이왕문이다. 다른 두 천왕은 중문에서 사찰을 지키고 있다. 오래된 목조의 천왕상 사이로 들어가면 바로 옆으로 고덴(어전)의 입구가 있다. 법황과 황족 출신이 주지를 맡았던 사찰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특별한 장소. 황실에만 사용하는 글자 ‘어御’를 사용함에서 이미 고유하다.
칙사문(조쿠시몬). 은빛 문양이 화려하다.
황실사찰로서 복원된 닌나지, 그 중에서도 어전의 정원은 어제 봤던 난젠지의 정원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회랑을 따라 걸으며 처음 만나는 풍경은 넓게 펴진 하얀 모래가 인상적인 가레산스이 정원이다. 하얀 모래 사이에 뜬금없이 솟아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정면에서 좌측에 귤, 우측에 벚꽃나무로 황실을 의미하는 배치다. 하얀 모래, 파란 하늘, 정갈한 황실 양식의 건물이 그리는 모습은 아주 제대로 된 풍경화다.
백서원, 그리고 백서원에서 바라본 가레산스이식 남원. 칙사문과 담장 너머로 이왕문의 지붕이 보인다.
걸음을 옮겨 다음 정원은 작은 연못과 나무로 정원을 연출한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선종 양식의 가레산스이 정원은 정적이면서, 묘사하자면 먹으로 그린 단순한 선이 매력적인 그림과도 같다. 반면에 지천회유식 정원은 풍성한 나무와 작은 연못이 마치 색감이 풍성한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 위로 살짝 솟아있는 오중탑의 목선은 정원의 화룡정점이다.
신전(신덴)과 신전에서 바라본 지천회유식 북정. 신전은 의식이나 행사에 사용되는 어전의 중심 건물로, 교토 어소에서 이축된 황실 건축물이다.
흑서원에서 바라본 영면전(레이메이덴, 좌측 사진 중 우측 건물)과 내부의 모습. 중앙에 약사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회랑이 이끄는데로 천천히 정원을 감상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발길을 이끄는데로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그저 딱히 유명하지 않은 것인지, 그 시간에 정원을 보는 이는 우리 뿐이었다. 이렇게나 멋진 곳을 사람들이 몰라주다니,아쉬운 마음과 함께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 온전히 우리 것이라니,라는 기쁨이 함께 몰려왔다.
북쪽에서 바라본 이왕문과 중문(츄몬). 중문 역시 일본 중요문화재.
어전 정원을 나와 중문을 지났다. 양 옆으로는 오중탑과 관음전이 있는데, 관음전은 보수공사로 볼 수 없었다. 오중탑은 1층부터 5층까지 폭이 일정한 전형적인 형태의 사찰 목탑이다. 모습은 마지막 날에 본 동사(도지)의 목탑과 비슷한데, 높이는 도지오중탑보다 살짝 낮다. 목탑이 모두 사라진 석탑의 나라에서 온 자로써 전형적이라도 목탑을 보는 것은 언제나 벅차오르는 일이다.
닌나지 오중탑. 내부에는 만다라를 묘사한 불상과 그림을 모시고 있는데 비정기 공개 때가 아니라면 비공개 상태. 높이는 36.18미터.
황실 건물을 이축한 금당은 과연 닌나지의 피날레다. 금당은 이축된 여러 황실 건물 중에서도 당시 교토 어소의 정전격인 자신전(시신덴)을 이축한 것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자신전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화려한 금박 장식에 어딘가 수수한 모습은 화려한 모더니즘과 같이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조화롭다. 당연하게도 내부는 관람할 수 없는데, 어느 한 일본인 참배객이 뙤양볕 아래에서 조용히 참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끔 오중탑과 금당 내부를 공개하는 행사를 하는데 그 때 맞춰서 닌나지를 다시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금당(콘도). 교토 어소에서 이축한 황실 건축물. 가장 오래된 자신전(시신덴)으로 그 가치가 뛰어나다. 내부에는 아미타본존불을 모시고 있다.
금당의 좌우로 종루와 경전을 보관하는 경장이 있다. 일본 사찰의 종루는 모두 종을 가려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일반 참배객이 사찰에서 참배할 때는 깊이 숙이는 방식으로 삼배를 한 뒤 짧게 반배하는 식으로 절한다.
구소명신 신사는 닌나지를 수호하는 아홉 신을 모시는 신사다. 사찰과 신사가 혼합돼 있는 형태는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들어간 길을 다시 돌아 이왕문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만 이 또한 자유 여행의 묘미 아닐까. 만족스러웠던 만남을 뒤로 하고 금빛 물결을 만나기 위해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