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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은 목숨

by 마케터 임지은

'일정은 목숨'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주니어 시절, 우연히 보게된 한 선배의 포트폴리오에는 이 문장이 적혀있었다. 그 선배는 스타트업과 대기업을 모두 다녀본 경험이 있는, 빠른 판단력과 실행력으로 누구보다 신뢰받던 마케터였다.


일정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 당연한 문장을 왜 적어둔 걸까? 선배의 의도를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강렬한 한 줄의 카피는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저 문장의 무게를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스타트업을 떠나 처음으로 1,000명이 넘는 회사로 이직했을 때였다.



작은 스타트업에서 마감 기한이라는 건 사실상 '목표'에 가까웠다.


상황이 바뀌면 우선순위가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면 일정은 자연스럽게 미뤄진다. 더 급한 불을 끄다 보면 이번 주 런칭이 다음 달로, 다음 달이 다음 분기로 미뤄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마감 기한은 있지만 그건 하나의 가이드라인일 뿐, 그 누구도 일정이 변경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대기업에서의 마감 기한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그건 조직 전체가 맞물린 시스템의 약속이다.


대기업에서는 매년 연말이면 부서별로 올해의 프로젝트 결과를 리뷰하며, 무엇을 잘했고 잘못했는지 복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모아 우리 회사가 내년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각 부서가 언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전사의 연간 계획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계획은 반드시 수행한다. 쓰기로 한 돈은 무조건 쓰고, 계획된 일정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원칙이다. 한 팀의 일정이 밀리면, 그 뒤의 팀들이 도미노처럼 흔들리기 때문에 일정은 미룰 수도, 미뤄서도 안 된다.



이직 초반에는 그 문화가 너무나도 답답했다.

"이 기획 조금만 더 다듬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건 중단하는게 돈을 아끼는 일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도 일정이 정해져 있으면 그대로 내야 했다. 100%가 아니어도 약속한 날에는 반드시 결과물을 내야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만들어 둔 모든 결과물을 삭제하고 0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도 마감 기한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든 일정을 지키다 보니 일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이게 최선일까?'를 무한정 고민하지 않고, '이 정도면 지금은 충분하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다. 애매한 부분을 붙잡고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으니, 지금 이 일정 안에서 꼭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감각이 생겼다.


광고 촬영과 프로모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캠페인 릴리즈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모델이 활동중단을 하는 등 절대 그 일정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 문제 상황이 발생해도 '어떻게든 해낸다'는 마인드셋을 장착하자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 보였다. 문제해결력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뢰가 쌓인다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이번 달까지 한다고 했으니 믿고 내 일을 진행해도 되겠다.' 이런 신뢰가 쌓이면 협업이 매끄러워진다. 반대로 일정을 못 지키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일정을 믿지 못하고 버퍼를 두거나, 아예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게 된다.



그제야 깨달았다.

선배가 말한 '일정은 목숨'은 단순한 시간 관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일정을 지킨다는 건 내가 한 약속을 지킨다는 뜻이자,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뜻이자, 내가 조직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리 잡는다는 뜻이었다.



물론 모든 일정을 100% 지킬 수는 없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항상 생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일정을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르다. 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 신호를 빨리 감지하고, 미리 커뮤니케이션하고, 대안을 준비한다. 반대로 일정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마감이 코앞에 와서야 '안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일정은 목숨'이라는 말은 완벽주의를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다.


무한정 고민하기보다 빠르게 결정하고, 100%가 아니어도 80%를 제시간에 내놓고, 20%에 대한 아쉬움은 다음 사이클에서 개선하는 그것이 진짜 프로의 리듬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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