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겨울

<브루탈리스트>, <나의 미카엘>

by 연이민


지난달,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일하는 회사에 강연을 하러 방문했다. 평소 그의 유튜브를 구독했기에, '예컨테, 다시 말하자면' 같은 특유의 말버릇을 직접 듣는 건 묘한 경험이었다. Q&A 세션, 평론가님의 2025년 최고의 영화는 무엇인가요? 누군가의 질문. 그는 망설임 없이 두 편을 언급했다. 그중 하나가 <브루탈리스트>였다.

25년의 1월, 나는 많은 시네필 그러하듯 '좋다는 신작'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출근하곤 했다. 다만 세 시간 반에 이르는 러닝타임과 야근이 겹쳐 도무지 볼 수 없는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브루탈리스트>였다. 당시 놓쳐 아쉬웠던 지난 감정을 안고, 12월에 OTT로 영화를 틀었다.






영화는 긴 러닝타임에 걸맞게 여러 층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건축이라는 포장지로 벗기면, 이민자의 삶, 유대인 정체성, 건축학 이상, 권력의 위계질서, 그리고 모든 것을 관통하는 실존의 무게가 나온다. 겹겹이 쌓인 이야기 중에 울림을 전한 것은 이민자의 괴로움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가진 복잡한 역사 때문에 가볍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건축가인 라즐로는 자신이 짓는 건물의 미적 완성도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깎아 넣는다. 외부 감사에 의해 예배당의 층고가 낮아지게 되자, 그는 자신의 보수를 털어 지하를 파내 원래의 비율을 지키려 한다. 완벽에 대한 의지가 라즐로라는 건축가의 자유의지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권력 구조 속 희생되는 이민자의 은유로 읽힌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이민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쉽지 않은 그 길에서 건축주-건축가로 비유되는 권력의 상하, 모든 계층의 아래를 담당하는 그 괴로움은 영화 내내 슬프게 이어진다.

1부 내내 아내와 사촌 조피아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쓴다. 부부 사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결혼식 사진을 배경으로 한 여운을 남긴 인터미션이 흐르고 2부가 시작된다. 아내는 남편이 없어서 괴로워서 환상통을 앓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 와도 다리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 때문인지, 미국 때문인지, 아니면 가지 않은 예루살렘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예루살렘을 밟기까지 해소되지 않을 허상의 괴로움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 작품에서 가장 총명한 인물인 아내의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라즐로는 눈을 가리고 아편과 성적 쾌락으로 그녀를 취하게 한다. 이민자가 미국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비유처럼 느껴졌다.



뷰런이 라즐로에게 '건축이란 무엇이냐'라고 묻자,

라즐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큐브를 설명하려면 큐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전쟁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용되고, 분노는 혁명을 일으키겠지만, 내가 지은 건물은 강의 침식에도 남을 것이다.


전쟁과 분노는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는 가치이지만, 건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사건이 어떠했든, 건물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 불변성에서 라즐로가 여실히 쌓아온 미적 이상은 빛을 낸다. 미국에 와서 처음 진행한 도서관 프로젝트. 쫓겨나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도서관은 여전히 존재했고, 에필로그에서 증거로 나오는 건축물은 그 모든 수모와 고통을 견디고 남아있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다. 예루살렘 지명이 나오니, 현실의 층위가 떠오르는 감각이 존재했다. 그러던 중 <나의 미카엘>의 배경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그 책의 배경이 예루살렘이란 걸.

이 소설에서 예루살렘은 성공한 도시가 아닌 실패한 도시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한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만 있으면 권태롭고 다른 무언가를 갈구한다.


세대에 걸쳐 상징화된 땅에 실존하는데도, 왜 행복할 수 없을까? 예루살렘에 실존해야 한다는 믿음, 땅에 있는 것은 존재를 증명할 테지만, 그 자리에 있는다 하더라도 개인의 일이 모두 해결되진 않는다. 꿈에서 한나가 원하는 사람은 오히려 유대인이 아니고 아랍인이다. 메시아가 내려올 도시는 건조하고 삭막하다.

브루탈리스트와 나의 미카엘에는 공통적으로 실존이라는 키워드가 흐른다. 장식을 버린 건축처럼, 실존주의도 핵심만 남긴다.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죽음과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실존하는 것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건물은 변하지 않고 남고, 이 땅을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 민족의 실존을 확인한다. 이 두 작품이 서로 다른 예술임에도 마지막엔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당위성이 아닌 실존이란 가치.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한 인식도 하나의 스펙트럼이라는 것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