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로 인해 달리기 코스가 급변한 요즘, 동네의 지형지물 탐색에 적잖은 시간을 쏟고 있다. 이미 달리는 사람 뒤를 따라가면 되지, 시간이 남아도느냐고? 그럴 리가. 이게 다 공포 때문인데, 일단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뿐히 지르밟는 맨홀이 무섭다(속이 들여다보이는 빗물받이는 더 무섭다).
모르고 밟았으면 모를까, 알고는 밟지 않는다. 멀쩡하던 맨홀이 갑자기 땅으로 꺼질까 봐(그렇다. 나는 ‘아파트 무너지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하루에 세 번쯤 꾸준히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일단은 천천히 걸으며 위험 요소를 체크할 수밖에. 오늘의 꼼꼼한 점검이 내일의 기록 단축에 기여할지니!
시간을 들여 뚜벅뚜벅 걷다 보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동그라미가 있다. 오수관과 우수관이 그것이다. 둘 다 둥그런 강철 맨홀임에는 틀림없는데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미묘하게 다르다. 우수雨水와 오수汚水. 우수관에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지만 오수관에는 구멍이 없다. 우수관은 구멍을 통해 빗물을 모으고, 오수관은 ‘구멍 없음’으로 악취를 막는다. 발음과 모양새가 대동소이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역할은 전혀 다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근 한 달간(6월 초~7월 초) 땅바닥의 동그라미를 톺아보고 다닌 결과에 의하면,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동그라미는 희한하게도 거의(열에 아홉) 붙어 있다. 유지 보수 작업의 편의를 위한 조치이겠거니 짐작하면서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몇 시간을 검색했지만 뚜렷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하수도는 도시의 혈관’이라는 비유답게 한번 의식해서 보기 시작하니 곳곳에 이 ‘동그라미 세트’가 얼마나 많던지. 아파트 단지 안에도, 시내 한복판에도, 하천 산책로에도.
우수관에 모인 빗물은 하수처리 시설을 거치지 않고 하천으로 곧장 빠져나간다. 오수관을 흐르는 오수는 하수처리장에서 정화 과정을 거친 뒤에 하천으로 방류된다. 둘은 갈 길이 다르다. 때문에 우수관과 오수관을 연결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실수로든 고의로든 이를 어기면 하천 수질에 악영향을 미칠 테니.
내 안에도 우수관과 오수관이 있다. 나도 모르게 우수관 뚜껑과 오수관 뚜껑을 바꿔 닫은 적이 있던가. 우수관으로는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없고, 오수관에서는 악취가 풍기는 것 같다. 계속해서 비우고 흘려보내야 할 것을 붙잡고 싶어 애써 꽉 막힌 뚜껑을, 조용히 삭여야 할 감정을 들키고 싶어 일부러 구멍 뚫린 뚜껑을 엇갈려 닫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폭우가 내리기 전에 어서 뚜껑을 다시 바꿔 닫아야겠다. 집중호우가 오수관의 마중물이 되어 똥물이 역류하기 전에. 열어야 할 구멍은 열고, 막아야 할 구멍은 막자. 비우고 흘려보내야 할 것은 우수관으로, 조용히 삭여야 할 감정은 오수관으로, 각자의 길을 통해 순리대로 방류되도록. 동네의 지형지물만 살필 게 아니라 내 마음도 부지런히 들여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