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하고 싶은 시상식이 있었다. ‘가고 싶다, 가고 싶어!’ 마음속으로 계속 주문을 외워서인지 그 무렵 길몽을 꾸기도 했다. 열망은 제멋대로 확신으로 바뀌어, 나는 어느새 초대받지도 않은 시상식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땐 뭐에 씌웠던 게 확실하다). 믿음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나는 옷장을 열어 화사한 어느 봄날의 시상식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그야말로 김칫국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들뜬 마음으로 옷장을 열었지만 늘 그렇듯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최근 몇 년간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나갈 자리도 없었거니와 그나마 갖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다 어정쩡했다. 유행을 정면으로 거스르거나 현재의 체형을 묘하게 거슬렀다. 희한한 일이다. 누가 떠밀어서 억지로 산 것도 아닌데, 분명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고른 옷들인데 왜 번번이 입을 게 없는지.
그렇다고 새 옷을 사자니 아직 발표도 나기 전이라 고민스러웠다(김칫국은 셀프로 마셨지만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 번 옷장을 훑으며 유행과 무관하면서도 최대한 단정한 재킷을 골라잡았다. 과한 어깨패드만 손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얼마 전에 밑단 수선을 외뢰한 청바지가 엉망이 되어 돌아온 뒤로 단골 수선집에 발길을 끊은 참이라 갈등이 됐다. 못 이기는 척 눈 딱 감고 한번만 더 맡길 것인가, 새로운 수선집을 찾을 것인가.
‘그래, 결심했어! 이 옷은 실수하면 안 돼. 확실한 곳을 찾자!’
머릿속이 ‘수선집’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동네 간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며가며 모든 간판과 아이컨택을 하자 그동안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학원이 자리한 상가 지하에 수선집이 있었다는 사실! 무려 4년 만의 발견이었다. 그 수선집 간판은 빛바랜 지 오래라 의식해서 보지 않으면 다른 간판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다. 간절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간판이랄까. 다만, 지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붙은 입간판은 평범한 듯 비범한 포스를 풍겼다.
“명품의류수선”
“기술보장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홍보 문구라니! 내가 나를 보증하겠다니! 스스로 잘났다는 사람치고 진짜 잘난 사람 본 적이 없어 평소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멀리 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감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단골 세탁소 사장님이 추천해 준 곳이기도 했다. 갑자기 샘솟는 믿음을 막을 수 없었다. 막고 싶지 않았다!
과연 어떤 분이기에 ‘본인이’ 스스로 ‘본인의’ 기술을 보장할 수 있는 건지, 자부심의 원천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수선집 유리문을 두드렸다. 분명 좁디좁은 공간인데 실내의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장님의 성격이 한눈에 보였다. 수선이 끝나 옷걸이에 걸린 채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옷들이 번지수 잘 찾아왔다며 나를 환영해주는 듯했다.
‘아직’ 초대받지 못한 시상식에 입고 갈 재킷을 내밀며 잘 부탁드린다고 하자 사장님은 대답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이사 오셨어요?”
“아, 온 지는 좀 됐는데…….”
“우리 집 처음인가요?”
사장님은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오랜만에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사 왔느냐는 질문에는 ‘내 솜씨 아직 모르는군?’이라는 함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기대치 그래프가 계속해서 높아만 갔다.
약속 시간에 맞춰 옷을 찾으러 갔다. 대대적인 수선은 아니었지만 애물단지였던 옷들이 장인의 손길을 거쳐 당장 입고 싶은 옷으로 변모했다. 손재주 좋은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수다쟁이가 되는 나는 알고 있는 감탄사를 총동원했다. 반면에 사장님은 그런 설레발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옅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숙련된 장인의 애티튜드로 느껴져 존경심이 일었다.
몇 년째 장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옷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중 몇 벌과 다른 수선집에 맡겼다가 후회한 청바지까지 싸들고 다시 사장님을 찾았다. 놀랍게도 본전 포기하고 버릴까 했던 청바지마저 흡족하게 복구됐다! 이쯤 되고 보니 수선 안 하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이삿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도 한몫했다).
“기술보장합니다”
수선된 옷을 찾아 나오는 길, 상가 벽에 붙어 있는 문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다렸던 공모전 당선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고, 수선한 재킷은 목적지를 잃었다. 20년이 넘도록 글쓰기라는 길 위를 걷고 있는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건 뭘까?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거나 늘 글쓰기를 최우선으로 여겼다고 말할 순 없다. 그저 잘하고 싶어 계속 붙들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려야 성과가 나올까. 나는 언제쯤 내 ‘기술’을 보장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에게 기술이 있기는 한 건가.
며칠 후 이사를 했고, 이틀에 한번은 달려야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는 급한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달리기 코스를 정하느라 자주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아치 다리가 심심찮게 보였다. 물줄기의 폭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곳곳에 놓인 아치 다리의 모양도 조금씩 달랐다.
‘아치’, 아치는 아직 동그라미가 되지 못한 것인가. 동그라미가 되려다 포기한 것인가. 아니다. 뭐라도 되고 싶어 갈팡질팡하는 나와는 다르게 아치의 자태는 그 자체로 흔들림 없이 아름답다. 아치는 동그라미와는 무관한 그냥 아치 자신이다! 나에게 묻는다. ‘꼭 누군가에게 채점을 받아야 할까? 반드시 동그라미를 받아야만 할까?’
쉽게 포기하려는 아이들에게, 낙담해 있는 지인들에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던 나였다. 속으로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도 않으면서. 노력도 가끔 배신하더라. 결과가 항상 쏟아부은 노력에 비례하진 않더라. 다만 인생에 한 가지쯤은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진행형’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포기하지 않는 게 ‘유일한 재능’일지도? 만약 언젠가 나의 작업실이 생긴다면 간판에 이렇게 쓰고 싶다.
“마감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