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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카오임팩트 Mar 25. 2021

문제를 정의한다는 것

소셜섹터문제정의현황연구『어떤시작』- 에필로그


문제정의의 세계관


"신이 항상 움직인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오?"
"이동하면서요."

- The Two Popes, 2019


세상엔 여러 개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세계관은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만은 아닙니다. 세계관은 실제 세계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문제해결에 있어서도 세계관이 작용합니다. 예를 들면 혁명가와 행정가, 벤처 기업가와 조직 관리자 등은 문제 정의와 해결에 있어서 정반대의 인식체계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급니다. 그 외에도 발명가, 인류학자, 입법가, 사법가, 리빙랩 코디네이터 등이 떠오르는데요. 이들은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각각 다른 인식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제정의도 어떤 세계관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개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지닌 전통적 병리학자(pathologist)와 대부분의 서양 의사,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대체로 문제를 품고 있는 ‘닫힌 계’를 상정하고 그 안에서(정도는 다르겠지만) 변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역학자(epidemiologist)나 사회병리학자, 생태학자 등은 한 세계와 그 바깥, 개인과 환경 등을 연결시키려 노력합니다. 어느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해결하려 하는 문제가 다르기에 적용되는 세계관도 다르겠지요. 


그렇다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혁신가에겐
어떤 문제 정의의 세계관이 어울릴까요?


인터뷰를 했던 혁신가들에게 문제를 정의하는 일은 새로운 답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특정한 단계이기보다는 답을 찾는 과정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흐름, 혹은 일하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모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 혁신의 나선 구조에도 발견됩니다. 나선 구조에 문제 정의 단계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의 '촉발(prompts)'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촉발'은 필요를 발견(identifying needs)하는 단계에 가깝습니다.


* Caulier-Grice, J. Davies, A. Patrick, R. Norman, W. (2012) Defining Social Innovation.



내러티브와 피드백


탐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통상적인 이상은 단지 연구자와 독립된 실체를 충실히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다. 탐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은 인간과 자신의 환경들-자신의 삶,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나아가 세계-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신의 환경들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Dewey)”…

김병극, 2012,『내러티브 탐구의 존재론적, 방법론적, 인식론적 입장과 탐구과정에 대한 이해』, 교육인류학 연구, 15권 3호, 2p


문제 정의의 세계관 중 가장 빈번히 접할 수 있는 것은, 문제 정의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관으로부터 조금만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문제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설득력이 약하다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특정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는 사회 문제에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존재를 가상으로 지목하는 순간 혐오나 일점돌파 같은 방법론이 채택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근본 원인을 외면하는 다른 그룹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인터뷰에서 만난 혁신가들은 문제의 근본 원인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전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해왔던 활동들과 나의 관계들 속에서 어떤 문제로 구성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지켜보라는 조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정의(define)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문제를 발견 (identify)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감각은 단순히 객관적인 통찰을 가로막는 주관성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나의 ‘고유성’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고유성 혹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내러티브가 문제의 정의와 문제의 솔루션을 잇는 핵심 고리입니다. 나의 감정, 희망, 욕구, 반응, 판단이 모두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나의 맥락입니다.


다만, 개인의 맥락만을 관찰하며 문제를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맥락을 구성하는 선들이 도달하는 사회 문제는 그것을 분석하고 관찰하고 참여할수록 피드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피드백들은 다시 나에게 새로운 통찰과 감각을 제공합니다.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단편적인 정보의 형태로 나의 맥락과 연결되는 것이 시작이라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당사자를 만나 대화하며 얻은 정보를 다시 나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피드백입니다. 피드백은 다시 나의 감각과 맥락을 변화시키고, 잘 축적된 피드백을 통해 나의 전문성과 역량이 증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사회 문제에 대한 축적된 지식 못지않게, 좋은 피드백을 줄 수 있는 동료와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문제정의를 하는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나 질문이든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내가 구상한 혁신적인 제품이나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회를 연구진은 내러티브의 피드백 루프라고 호명했습니다.



그리고 문제 정의를 한다는 것은 혁신가가 이 피드백 루프에 올라서는 것이라는 의미로 정의했습니다. ‘피드백 루프에 올라선다’는 짧은 문장 속에는 문제정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매뉴얼이 아니라 역량이며, 확신이 아니라 태도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솔루션을 도출하는 특정 단계가 아닌, 문제해결의 모든 과정에서 묻고 되묻기를 반복하는 끈기가 문제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생성·변화하는 문제해결의 각 국면에서 각 국면에 어울리는 질문을 찾고 그 답을 구하며 다시 질문하며 다음 국면으로 이행하는 노력이 곧 문제정의라는 의미입니다.



문제정의의 내재화


이는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하는 조직이 모두 문제정의의 공간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과 조직에 문제정의의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조직이 상명하달식의 닫힌 구조라면 문제정의는 작동할 수 없습니다. 정해진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세계관으로 구성된 조직이라면 문제정의보다는 자원의 집중이 더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조직의 성장 과정에서 혁신의 필요가 제기되는 조직이라면 조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각각의 문제정의가 조직의 중심부와 끝단까지 막힘 없이 소통되는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지막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지금 문제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시대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된 운동,잘 체계화된 행정조직, 자원의 집중에 능숙한 경제 조직이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반면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 행정의 외부에서 불어오는 실험의 바람, 분산된 자원들의 네트워크가 사회 변화의 한 축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회 문제는 과거의 데이터로 해석되긴 어렵습니다. 대신 분화되고 다원화된 개인과 조직이 각자의 영감과 가설, 통찰을 통해 커다란 사회 문제를 향해 집합적인 해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문제정의는 이러한 개인과 조직들이 서로의 질문과 답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프로토콜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어떤 시작 말입니다.


이 연구가 누군가의 시작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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