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덕

by ROVER

10대 중반, 후반부터 영혼이나 삶의 의미, 존재의 근본 같은 것들에 대해 의문하고 숙고하고 공부하면서 동방의 현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자주 감화되었다. 여러 가지 영성 관련 자료들 속에는 서양이 물질 문명이라면 동양은 정신 문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계가 한 번 크게 휘저어지다 뿌리부터 변화하는 시기가 도래할 때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극동의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게 한국이 아닐 리 없다는 생각에 전율하기도 했다. 이곳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그때 이미 인간들로부터 형편없이 할퀴어진 내 마음이 나에게 물었다. 내 주변 세상에서 나는 영적으로 정말 발달된 한국인을 본 일이 없는데 내 폭력으로 얼룩진 삶 밖에는 그런 예의 바른 현자들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늘 그런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 의인이나 선인에 대한 뉴스들을 볼 때면 역시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고운 심성이 기본값으로 내재되어 있다(하지만 현대의 삶이 너무 고단해 그 심성을 발현하고 사는 이들이 안타깝지만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의심들을 쓸어냈지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꼭 한국인이,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가에 대한 확답을 하기 힘든 마음이 되었다.


지금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다 같은 인간일 뿐이며 세계 어디에나 선량함을 지키는 이와 악랄한 이가 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까운 미래의 일이든 조금 또는 먼 미래의 일이든 세계의 기반 진동이 한 차례 크게 도약할 때 도덕을 지키고 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각기 다른 세상으로 옮겨질 것이다. 이는 우주의 순환과 진화의 기본 원리이며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 등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종말론일 것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온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영혼 농사와도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이제 내가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한 가지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날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도덕의 세부와 실현 방법들을 일일이 따져 보게 되고 나 자신의 여전한 부족함을 절감하며 끝없는 겸허함과 분투에 대한 열의를 느끼게 된다.


최근 내가 이곳 말고 다른 데서 운영하는 온라인 계정에 악플들이 수없이 달린 일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간단한 영적 지식과 의식 확장법, 점성학 차트 분석 내용 등을 게시하는데 알고리즘이 그 계정의 어떤 글을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악플을 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17살 짜리 야구 팬인 아이도 있었고 나이 지긋한 이들도 있었다. 남녀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이 시작한 악플에 불나방처럼 달려 들어 악의 서린 이야기에 동조하고 내 글을 멸시하고 희롱하는 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익숙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익숙하게 질문하게 되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네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누구인가. 네 도움을 도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인 세계에서 너는 무엇을 어떻게 행하며 시대와 인류에 대한 좌절감이나 실망감 등을 건강하게 해소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나는 현자도 선인도 아니다. 하지만 진화하는 세계와 영혼의 과정에 일조하고 싶다. 이는 나 자신에 대한 과신인가, 과욕인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하고 속상한 며칠을 보냈다. 모두의 영혼이 기저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출렁인다는 걸 알면서도 모두를 돕겠다는 내 마음이 한없이 알량해 보일 때가 있다.


정말 이 세계에는 희망이 있는가. 진화가 가당한가. 그런 일을 겪은 밤이면 지구와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좌초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암담하기도 하다.


마음이 과하게 어지러울 때면 버릇처럼 네이탈 차트를 들여다보며 내가 이 생에 짊어지기로 한 과업과 처리해야 하는 카르마들을 살펴 본다.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이런 영적인 것들을 다루고 사람들과 나누며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또 그 일이 마냥 수월하지도 순조롭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까다롭고 벅찰 때도 있겠지만 이 일은 사실 내가 내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원해 온 일이고 가장 나에게 큰 즐거움과 보람을 가져다 주는 일이기도 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돈이 되지도 않는 일을 미친 사람처럼 열심히 하는 것도 결국에는 다 내 업보일 것이다. 어느 많은 생에서 나는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끊임없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 역할이 힘에 부칠 때가 있어도 최선을 다해 내 소명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한결 잠잠해진다. 사실은 모두가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자질을 가지고 모두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면 덧없이 일어나던 불안감이 잦아들고.


아무튼 내가 가진 나만의 고유한 선의는 모두를 향해 있지만 모두에게 내 도움이 유효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을 취하며 지금껏 성장해 왔듯 내가 세상에 내놓는 것들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만 활용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자 싶으면서도 세상이 급변하는 것 같은 요즘에는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지기도 한다.


하여간 모든 장광설의 핵심은 결국 도덕성이다. 내 에너지적 경계와 도덕성의 영역을 잘 지키며 남은 겨울을 잘 보내 보려 한다.

keyword
ROVER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4,133
작가의 이전글카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