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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Nov 22. 2021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 남자의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 중년기까지 넘어와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소리 죽여 바라봤다. 그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취한 태도는 충분히 노력하였다고 자신해왔다.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다고. 그가 통증을 느끼고, 어느 의사로부터도 믿음가지 않는 처방들을 받아들이면서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몸, 그래서 죽음에 가까워오는 것을 또렷하게 인정하면서 이제서야 자신에게 자문해본다.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고,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왜 그의 죽음이 공개되기 전 지인들의 모습부터 그렸을까? 


그의 지인이자 친구들은 그의 죽음 앞에 놀라움과 애도를 표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지위가 변할 것을 직감한다. 그의 삶을 애도하는 곳에 가는 것은 예의이자 매너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에 앞서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무엇이었는지, 그의 남겨질 유산은 어느 정도일지를 먼저 떠올린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이반 일리치와 아주 가까웠던 이른바 친구들이란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예절이라는 이름의 대단히 지겨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상기했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10p


하지만 그에 앞서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의 무관심함에 상처받고 분노한다.


오랜 기간 고통스럽게 병마와 씨름하면서 이반 일리치는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다. 아이를 달래며 보살피듯 다독여 주고 입을 맞춰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 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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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86/87p


그가 바란것은 그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함께 슬퍼해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하인 게라심만이 누구에게나 죽음이 다가오고, 그 죽음 앞에 도움이 필요할 뿐인 것을 인정하고 그의 곁에서 그의 시중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가 그에게만은 마음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였을 거다.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은, 그 죽음 이후의 허망함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거라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또한 그 두려움의 감정을 더 강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마 더 강하게 부정하고 싶은 삶의 모습일거란 생각을 한다.

그가 그렸던 삶의 모습에 그의 의지는, 적어도 정말 간절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들어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가 그랬듯이, 죽음 앞에서 모든 생명이 유한하고 평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를 먼저 질문하게 될까. 이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말하게 될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 앞에서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다시 또 겸손해지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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